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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남의 길
• 하나님의 사랑
영원한 속죄, 영원한 구원
  • 11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히 9:11 ~ 12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양이나 염소나 송아지를 잡아 속죄 제사를 드렸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구약시대 사람들은 오랫동안 양이나 염소 같은 짐승을 잡아 제사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앞에서 살펴본 바 있는 것처럼, 약속어음을 우선 끊어 주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멀리서 바라보고 믿은 것입니다. 그런데 약속어음만 계속 끊어주면 어떻게 합니까? 실제로 때가 되면 돈을 지불해야 하듯이, 염소와 송아지 피로 제사 드리는 대신에 실체되신 예수님이 오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오셔서 짐승의 피 아닌, 흠도 점도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영원한 속죄 제사를 단번에 완성하신 것입니다. 인류의 시작부터 끝까지 시간을 초월해 효과를 갖도록 예수님은 영원한 속죄(贖罪)를 이루시고 단번에 하늘 성소에 들어가셨습니다.

속죄(贖罪)란 예수님에 의해 우리 죄 값이 치러졌다는 뜻입니다. 그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께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지극히 화평한 맘으로 찬송을 부름은 어린 양 예수의 그 피로 속죄함 받았네 속죄함 속죄함 주 예수 내 죄를 속했네”(찬송가 189). 우리의 죄 값(죽음)을 대속(代贖)하신 일은 예수님이 하셨고, 예수님이 하신 그 일로 인해 우리가 지불해야 할 죄 값은 없어졌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죄 때문에 더 이상 두려워할 일이 없도록 해 두셨습니다

죄 값으로 지불하신 예수님의 피는 예수님이 오시기 전의 사람들의 죄는 물론이고 인류역사 끝 날까지의 모든 사람의 죄를 다 씻으셨습니다. 아담부터 시작해서 마지막에 태어날 사람까지, 모든 인간은 예수님의 피로 인해 하나님께 죄 사함을 받은 것입니다. “영원한 속죄”를 이루신 것입니다.

성경에 영원(永遠)이라는 말은 두 가지 뜻으로 나와 있습니다. 단순히 긴 시간이나 역사를 영원이라고 표현한 것이 그 하나이고, 시작도 끝도 없이 계속적으로 진행되는 무한대의 개념의 것이 다른 하나입니다. 우리는 한정된 시간 속에 살고 있으므로 몇 천 년 전이니, 몇 천 년 후이니 하는 시간 개념이 있지만, 하나님께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천국에 가면 거기에는 시계가 없고 달력도 없을 것입니다. 얼마의 시간이 흘러가는지 그런 것 계산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같이 영원 속에 들어가 버립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십니다. 영원하신 그 하나님께서 인간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원(圓)과 같은 영원의 세계에서 한 자락 베어내어 펴놓은 것이 인간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날 그렇게 시작된 역사가 쯕 진행되다가 또 어느 땐가 끝나면 다시 영원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을 포함한 인류의 역사는 영원과 영원 사이의 한 막간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아담 때부터 세상 끝 날까지 단지 하나입니다. 인간이 생각할 때 시간이 긴 것이지, 하나님에게는 아무리 긴 시간도 순간일 뿐입니다.

“영원한 속죄”(eternal redemption)라는 것은 그러한 하나님의 관점에서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하나님께 드리신 “죄를 위”한 “한 영원한 제사”는 우리를 “영원히 온전케”하는 효력이 있습니다(히브리서 10:12,14). 우리 모든 죄는 하나님께 영원히, 완전하게 사함을 받은 것입니다. 전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인간에게, 개인에게 있어서는 과거와 현재는 물론 미래까지 그 효과가 미칩니다.

태어나서 오늘까지 사는 동안 지은 모든 죄를 하나님이 사해 주신 것은 말할 나위 없습니다. 구약시대 사람들은 사해 주실 것을 믿었고, 우리는 이미 사해 주신 것을 믿습니다. 그런데, 앞으로 죄 지어도 좋다는 얘기가 아니라, 이후로 살면서 우리는 죄 지을 수 있습니다. 육신이 사는 동안 혹 실수할 수 있고 잘못할 수 있습니다. ‘나는 앞으로 한 번도 죄 짓지 않겠다’고 다짐할지라도 자기 의지와 관계없이 죄 지을 수 있습니다. 이후에 짓는 죄는 어떻게 할까요? 그것도 사해 주셨습니까? 앞으로 지을 죄도 물론 사하셨습니다.

누가 그렇다고 했습니까? “이목사가 그럽디다!”라고 하면 큰일 납니다. 성경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이 그렇게 증거하고 있으며, 성경말씀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책임지십니다.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변치 않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도 변치 않습니다. 영원한 속죄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죄 사함 받은 것도 영원토록 효력이 있습니다. 과거의 죄 현재, 그리고 앞으로 지을 죄까지 하나님이 이미 사하셨습니다. “영원토록 내 할 말 예수의 피 밖에 없네. 다시 정케 하기도 예수의 피 밖에 없네”(찬송가).

저는 예전에 강단에서 2년간 설교하던 중 제가 거듭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제 죽으면 나는 지옥 가는구나!’ 하고 너무나 답답해서 고민해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말씀은 귀가 아프게 들었고, 저 또한 그렇게 설교했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깨우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이 고맙기는 고마운데, 그런데도 안심이 안 되었습니다. 겉으로 말은 안 해도, 속으로는 ‘가만 있자, 예수님은 천구백 몇 십 년 전에 십자가에 죽으셨고 예수님의 피도 흘러 말라붙어 버렸는데, 그것이 지금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느냐?’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예수님은 예수님대로 죽으셨고 나는 나대로 죄 때문에 답답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옛날 천구백년 전에 죽으신 예수님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것입니다. 이상한 말 같지만, 믿는데 안믿어집니다. 예수님은 예수님 대로 죽고 나는 나 대로 답답하고…. 여러분 어떻습니까?

교회 다니며 예수님 믿는다고 하는데도, 죄 때문에 항상 답답하고 괴롭습니다. 교회 가면 항상 죄 때문에 “주여, 어찌 하오리까?”만 되뇌이며 눈물 흘리며 회개합니다. 믿기는 믿는데 안 믿어집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예수님 보혈의 능력이 우리에게 어떤 효력이 있는지를 확실히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중 1962년 10월 30일 저녁 8시경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라는 말씀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저는 그날 그 말씀을 처음 봤습니다. 이전에 그 성경구절을 많이 읽었을 텐데, 그 말씀을 저는 처음 봤습니다. 신학교 다니면서 성경 읽은 것만 해도 신약 50번, 구약 30번 정도는 됩니다. 그런데도 그날 처음 이 구절을 봤습니다. 눈에 콩이 박혔다는 말처럼,

제 눈이 가리워 있었기 때문에 못 본 것입니다. 성경은 눈으로 본다고 다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눈을 열어 깨달을 수 있는 영적 지혜를 주셔야 진리를 깨닫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셔서, 지금도 내 보증인으로 살아 계시다는 그 말씀에 “됐구나. 나도 됐다!”라는 탄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내 죄가 영원히 사해졌다는 것이 그날 처음 믿어졌습니다. “십자가 십자가 내가 처음 볼 때에 나의 맘에 큰 고통 제하네”(찬송가). 그날 저는 주님의 십자가를 처음 봤습니다. 내 마음에 죄에 대한 고통이 사라졌습니다. “오늘 믿고서 내 눈 밝았네 참 내 기쁨 영원하도다”(찬송가). 얼마나, 얼마나 좋은지. 주님이 내 죄를 영원히 사했다니! 이것이 꿈인가 생시인가 싶어 제 살을 꼬집어 봤습니다. 아, 사실이구나!

사형이 확정된 죄수에게 사형집행은 시간문제인데 어느 날 “***번 죄수 나오라”고 불리면, 그날 그는 죽습니다. 그와 달리 어느 날 특별사면(特別赦免)으로 불리움을 받았다면, 그는 사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어떤 수감자들이 대통령 특사(特赦)로 석방되는 것을 더러 볼 수 있습니다. 만일 정당한 법적 근거가 있는 사면장을 받았다면, 그 죄수는 그것이 꿈인가 생시인가 싶을 것입니다. 감옥 문을 나오면서 얼씨구나 하고 춤이라도 추고 싶을 것입니다.

그 날 얼마나 좋았던지, 저는 그것이 구원인지 거듭난 것인지 몰랐습니다. 단지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내 죄가 영원히 사라졌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음에 가득한 의심을 깨치고 지극히 화평한 맘으로 찬송을 부름은 어린 양 예수의 그 피로 속죄함 받았네. 속죄함 속죄함 주 예수 내 죄를 속했네”(찬송가 189) 라는 찬송을 부르고 또 불렀습니다. 이전에도 그 찬송을 많이 불렀습니다. 부흥회 할 때는 열나게 손뼉 치면서 “마음에 가득한 의심을 가지고 지극히 답답한 맘으로 탄송(松)을” 불렀습니다. 겉으로는 찬송인데 속으로는 탄송이었습니다.

마음에 가득한 의심을 가지고 지극히 답답한 맘으로 불렀었는데, 그제야 비로소 마음에 가득한 의심을 깨치고 지극히 화평한 맘으로 찬송을 했습니다. “확실히 믿기는 어린 양 예수의 그 피로 속죄함 받았네”(3절). “금이나 은 같이 없어질 보배로 속죄함 받은 것 아니요 거룩한 하나님 어린 양 예수의 그 피로 속죄함 받았네”(2절). 또 부르고 또 불러도 얼마나 좋은지. 이제는 지옥에 갈래야 갈 수가 없습니다. 지옥에도 밑천인 죄가 있어야 가는데, 죄를 다 사함 받았으니 이제는 천국 밖에 갈 데가 없었습니다. 그 은혜가 얼마나, 얼마나 감사하던지….

나중에 성경을 배우다 보니 그것이 구원(救援)이었습니다. 나중에 보니 그것이 거듭난 것이었습니다. 모든 문제가 다 해결이 된 것이었습니다. 그 날부터 지금까지 36년째입니다. 그 기쁨은 날로 새롭습니다. 성경 전체에서 이보다 더 놀라운 사실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가 십자가에 죽어 피 흘려서 우리 죄를 영원히 사했다는 그 사실보다 더 놀라운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 피에다 무엇을 또 보태야 합니까?

어떤 사람은 한다는 소리가 “피로 우리 죄를 사했어도 그것만 가지고는 천당 못 간다. 또 뭘 하나 더 깨달아야 된다”고 합니다. 또 어떤 이는 예수님이 우리 죄 값을 치루었지만 우리의 선행이 뒷받침되어야 구원이 완전해진다고까지 합니다. 그렇습니까? 예수님의 피가 우리의 죄값을 갚기에 부족합니까? 그래서 예수님의 피에다 또 뭘 보태야 구원이 완전해집니까? 예수님의 공로에 우리가 무엇을 더 보태야 할까요? 예수님의 거룩한 피에다 우리의 행위를 감히 더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피는 우리로 죄 사함을 얻게 해 주셨고, 예수님의 피는 우리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였습니다. 나는 비록 부족하지만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예수님의 피만 의지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피입니다. 예수님의 피는 우리를 지옥 갈 운명에서 구원할 뿐 아니라, 천국에까지 인도하는 데 넉넉합니다.

다만 구원받은 이후에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며 주를 위해 살고 주를 위해 죽기까지 하는 것은, 천국 가는 공로를 보태고자 함이 아니라 너무 기쁘고 감사해서 주님을 위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는 것입니다. 기쁘고 좋아서 하는 것 이상의 다른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피에다 또 뭘 보태야 된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거짓인 줄로 생각하면 틀림없습니다.

영원한 속죄가 아니고서는 구원이 안 됩니다. 이제까지 지은 죄는 사해졌고 앞으로 지을 죄는 사해지지 않았다면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만일 오늘 이 시간까지 지은 죄만 사했고 앞으로 지을 죄는 사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구원받은 조금 후에 죄 지으면 어디로 갑니까? “죄의 삯은 사망”이므로, 그 죄 때문에 이제까지 사함 받은 것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만일 이 시간까지 지은 죄만 사함 받았다면, 구원받고 조금 후에 또 죄를 지으면 지옥 갈 테니까 지옥 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죄 사함 받자마자 즉시 그 자리에서 죽어야 됩니다. 그래야 지옥에 갈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그럴 수는 없는 일이고, 우리가 구원받은 이후에 지을 죄를 사함 받고자 한다면 예수님이 또 죽고 또 죽고 자주 죽으셔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이와 관련하여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 죄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히브리서 9:25,26)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영원한 속죄가 되지 않는다면, 구약시대에 끊임없이 양을 잡아 제사했던 것처럼, 예수님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끝날 까지 계속해서 죽으셔야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고, 자기를 단번에 속죄제사로 드림으로써 영원한 효과를 갖게 한 것입니다. 한 번 죽으심으로써 영원히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고, 그것으로 죄의 심판은 끝났습니다. 구약시대 사람들의 죄도 거기서 끝났고, 신약시대 사람들의 죄도 십자가에서 끝났습니다. 한번에 영원히 끝났습니다. 그것이 영원한 속죄입니다.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브리서 10:10). 그리스도를 대신 죽게 하심으로써 우리 죄를 사해 주시고자 함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그 뜻을 좇아 예수님의 몸을 단번에 속죄 제물로 드리심으로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습니다. 거룩함을 얻었다는 것은 죄 없이 됐다는 말입니다.

컴퓨터로 전과(前科)를 조회해 보면 어떤 사람은 아주 지저분합니다. 남이 잘 모르니까 뻔뻔스럽게 다니지, 얼굴에 표시라도 한다면 얼굴 들고 돌아다니겠습니까? 그런데 어떤 특별조치로 그 전과를 말소(抹消)시켜 버렸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컴퓨터로 그 사람의 신원을 입력했더니, 전과기록 전혀 없이 깨끗합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 앞에 있는 범죄기록에서 우리 죄를 싹 지워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그것이 비록 사람끼리 지은 죄일지라도, 그 죄는 하나님 앞에 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범했기 때문에, 사람끼리 용서했다고 해도 하나님이 용서하지 않으시면 소용없습니다. 우리 죄가 사함을 얻으려면 하나님에게서 완전히 죄가 없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는 말씀은 내 마음과 생활이 거룩해졌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내게서 죄가 없어졌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우리 죄가 없어졌다는 말입니다. 거룩함을 얻으셨습니까? 우리를 내게 적용시키면 “내가 거룩함을 얻었노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읽으셔도 됩니다. 하나님 편에 있는 내 죄를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재차 말씀드리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을 믿는데도 완전한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영원한 제사, 영원한 속죄를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피를 부분적으로, 조금만 믿는 것입니다. 영원한 속죄여야 영원한 사함이고, 완전한 속죄여야 완전한 구원입니다. 복음은 완전한 것입니다. 아래 성경말씀을 다음과 같이 자기 이름을 넣어서 읽으셔도 됩니다. “오직 그리스도는 OOO의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렇게 읽어도 하나님께서 틀렸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이 누구를 위해 죽으셨습니까?” 라고 물으면 “예, 온 세상 죄를 위해 죽으셨죠” 라고 대답하고, “또 누구를 위해 죽으셨습니까?” 라고 물으면 “만민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죠” 라고 하며, “그럼 또 누구를 위해 죽으셨습니까?” 라고 물으면 “우리를 위해 죽으셨죠” 라고 대답하고, “그럼 당신 죄는 어떻게 됐습니까?” 라고 하면 “나는 죄 때문에 큰 걱정입니다”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온 세상, 만민, 우리는 아는데, 거기서 자기는 쏙 뺍니다. 세상 것은 ‘네 것도 내 것, 내 것은 원래 내 것’ 하면서 자기 것 못 찾아 먹을까 봐 기를 쓰면서도, 이것만큼은 자기를 쏙 빼어 놓습니다.

“내 죄는 사했네. 내 죄는 사했네. 주님이 흘리신 그 피로 내 죄는 사했네”(찬송가). 예수님이 치루신 대속으로 온 세상 죄와 같이 내 죄도 사해진 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나를 예수님과 1:1로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저녁이 되어 집집마다 전기가 환하게 켜졌는데, 한 집은 여전히 캄캄합니다. 그래서 그 집에서 전기회사에 전화를 했습니다. “여보세요, 전기회사입니까?” “그렇습니다만.” “왜 다른 집에는 전기를 다 보내주면서 우리 집에는 안 보내줍니까? 우리 집은 여지껏 캄캄합니다.” “아니, 그럴 리가 없습니다. 전기야 똑같이 보내는 거죠.” “아, 우리집에는 안 왔어요. 빨리 보내주세요.” “전기 스위치 켰어요?” “스위치가 뭔데요?” “스위치를 켜 보세요.”

그 집주인이 다시 전기회사에 전화했습니다. “여보세요, 전기 회사입니까? 전봇대 올라가서 우리집 쪽으로 막 흔들고 두드리고 해도 안 오는데요.” “스위치를 모르세요? 문 옆 벽에 젖꼭지만한 것이 있을 겁니다. 그걸 위로 올려보세요.” “그럴게요.” 전화를 끊고 스위치를 올리니까 전기불이 환하게 켜졌습니다. “우와!” 스위치 켜는데 왜 그렇게 힘듭니까? 전기가 발명되고 발전소가 세워지고 각 가정에 전기시설 된 지가 언제인데. 가정에서는 그냥 스위치만 올리면 되지 않습니까.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 편에서 다 이루어진 것을 믿는, 스위치 켜는 것만큼이나 간단한 것입이다. 이미 이루어진 사실(事實)을 나와 개인적으로 연결시키는 그것이 믿는 것입니다. 온 세상 죄를 사했을 뿐 아니라 내 죄도 사했다고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