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어지지 않는 보배로운 그리스도인의 삶
그러면 금과 은과 보석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금과 은과 보석은 나무나 풀과 짚에 비해 상대적으로 값진 것으로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 보시기에 귀한 삶, 하나님 나라를 위한 공로를 상징한 것이다. 나무나 풀과 짚은 불이 지나가면 타버리지만 금과 은과 보석은 타지 않는다. 나무와 풀과 짚은 육신을 위하여 심는 것이며, 금 은 보석은 성령을 위하여 심는 것이다. 나무와 풀과 짚은 육신을 따라 사는 것이며 금 은 보석은 성령을 따라 사는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는 것이 금 은 보석 같이 보배로운 것이며 영원한 상(賞)으로 남게 되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보배로운 것이다
9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_9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_고후 5:9-10
이 세상에는 정당한 재판이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이 있다. 큰 죄를 지은 사람이 활개를 치며 돌아다니는 경우도 있고, 죄가 별로 없는 사람이 억울한 누명(陋名)을 쓰고 감옥에 들어가서 평생토록 한(恨)을 품거나 고통을 당하다가 죽는 경우도 혹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므로 하나님의 심판대(審判臺) 앞에서는 그렇지 않다.
16 내가 해 아래서 또 보건대 재판하는 곳에 악이 있고 공의를 행하는 곳에도 악이 있도다17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의인과 악인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니 이는 모든 목적과 모든 일이 이룰 때가 있음이라 하였으며_전 3:16-17
의인과 악인의 심판이 있은 후 하나님의 모든 목적과 계획이 완성된다. 먼저 의인(義人)의 심판이 있고 후에 악인(惡人)의 심판이 있다. 그리스도인의 심판은 천년이나 먼저 있다고 할 수 있다. 주님이 공중 재림하실 때 그리스도인들은 주님 앞에 가서 먼저 심판을 받는다. 의인이라 함은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키며 그들은 구원받은 날부터 주님 앞에 가는 날까지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하여 심판을 받게 된다. 지금도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낱낱이 기록되고 있으므로 아무렇게 살면 안 된다. 악인의 심판은 자기가 행한 대로 형벌(刑罰)을 받고 지옥(地獄)에 가지만 구원받은 사람의 심판은 지옥에 가는 심판은 아니지만 구원받은 이 후부터 주님 앞에 가는 날까지 각자 선악간에 행한 대로 심판을 받는다.
그런데 고린도후서 5장 10절에서 말하는 “선악간”은 도덕적인 개념과는 조금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구원받은 이후 자신의 몸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선(善)이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 것이 악(惡)이다. 주님의 뜻대로 성령(聖靈)을 따라 사는 것이 선이고 주님 뜻대로 살지 못하고 육신(肉身)을 따라 사는 것이 악이다. 도덕적으로는 이 세상에서 남을 도와주는 것이 선이고 남을 해치는 것이 악이다. 물론 이것이 틀린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의 선악은 그와는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
그리스도인이 구원받고 난 후의 삶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게 된다. 구원받은 사람이 거(居)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써야 되는 이유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모든 것이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구원받기 이전의 모든 것은 하나님이 기억(記憶)하지 않으시므로 고민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구원받은 그날부터 주님 앞에 가는 날까지의 모든 것은 주님 앞에 계산(計算)이 되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다 드러난다. 주를 기쁘시게 했는지 못했는지, 얼마만큼 주님을 기쁘시게 했는지 등등 그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서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게 되는 것이다.
9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_고후 5:9
바울 사도는 차라리 몸을 떠나서 주님 앞에 갔으면 좋겠다고 담대히 말하면서도 죽기 전에 주님을 위해서 뭔가 일을 하다가 가야 되겠다고 하였다. “이 세상에 거하며 남아 있는 것이 주를 기쁘시게 하는 일이라면 내가 좀 살아야 하고 죽는 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라면 죽기를 원한다”고 하였다. 베드로는 주님을 위해서 살 뿐만 아니라 결국 주님을 위해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릴 것을 예수님께서 미리 말씀하셨다(요 21:18,19). 베드로는 주(主)를 위해서 평생 복음을 전하고 살았지만 마지막에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죽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베드로가 주님을 위해서 순교(殉敎)당한 것은 사실이다.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릴 것을 주님이 미리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주를 위해서 사는 것이 주님 뜻일 수도 있지만, 주님을 위해서 죽는 것이 주님을 위한 일인 경우도 있다. 무조건 주님을 위해서 많은 일을 하는 것만 주님을 위한 것은 아니다. 주님을 위해서 자기의 생명(生命)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초개(草芥)처럼 버리는 것으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수도 있다.
그러니까 살아서 주를 위해 열심히 일을 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면 살아야 되겠고, 죽음으로써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다면 죽어야 되는 것이다.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구원받은 이후 그리스도인들의 생애는 자기의 기쁨과 행복, 만족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자기의 것은 주님이 천국에 완전(完全)하고 영원(永遠)하고 영광(榮光)스러운 것으로 다 준비해 놓으셨으므로 자기를 위해서 더 이상 걱정하거나 애착을 가질 필요가 없다. 이 땅에 있는 것은 오로지 주님을 위해서만 존재(存在)하는 것이다. 심장이 뛰고 육체가 살아 움직이는 것은 오로지 주님을 위해서만이다. 살아도 주를 위해서, 죽어도 주를 위해서이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있는 것인데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_빌 1:20
바울 사도가 간절히 원하고 소망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나 부끄럽지 않게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케 되는 것이라고 했다. 의인(義人)은 사자(獅子)같이 담대하다는 말씀처럼 사람과 하나님 앞에 부끄러울 것이 없으면 담대할 수 있다. 그는 살든지 죽든지 자신의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케 되기를 원하였다. 살아서 주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시고 존귀히 되면 살아야 되고, 죽어서 주님의 이름이 귀하게 된다면 죽어야 되는 것처럼 오직 구원받은 사람은 그리스도를 존귀케 하기 위해서만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 6:9)라고 기도하라고 하셨다.
구원받은 이후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죽음 앞에 담대할 수 있는 사람은 주님을 위해서 남은 생애를 용감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다. 구원받은 사람의 생명은 주님의 손 안에 있는데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죽으면 주님 앞에 가서 좋고 살아 있으면 주님을 위해서 무언가 할 일이 있어서 좋다. 그런데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주님을 기쁘시게 하지도 못하고 이 세상의 별로 가치 없는 자기 육신을 위해서만 평생 애태우고 마음 조리고 수고하고 아귀다툼하다 세월을 다 보내게 된다. 주님을 위한 일이나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도 없이 자기를 위해서 살다가 자기를 위해서 죽다면 그것은 비참(悲慘)한 것이다. 바울 사도는 살든지 죽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라고 하였다. 우리도 주를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남아 있음을 마음에 간직하여야겠다.
10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_엡 5:10
성경 안에서 주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지 배워야 한다. 주님을 기쁘시게 한 모든 것은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는 상급으로 남는다.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_롬 12:1-2
구원받은 사람은 패역하고 음란하고 악한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變化)를 받아서 성경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해야 한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모든 생활은 영적 예배가 된다. 구원받은 사람의 말과 행동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한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것은 하지 말아야 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해야 한다. 매일 매번 모든 일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인지 싫어하시는 일인지를 분별해야 되는 것이다. 말이나 행동, 일에 있어 주님의 관점(觀點)에서 생각하여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이면 하고 주님이 기뻐하지 않는 것이라면 하지 말아야 한다.
성경에 기록된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 중에 “죄인(罪人) 하나가 회개(悔改)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義人)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 15:7)고 하셨기 때문에 잃어진 영혼을 주님 앞에 돌아오게 하는 일은 주님께 기쁨을 드리는 일이다.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시간과 물질과 수고, 필요하다면 목숨까지 바치는 것은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다. 또 구원받은 형제자매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도 주님이 기뻐하신다. 연약(軟弱)한 형제들을 위로(慰勞)하고 돕고 생활이 어려운 형제들을 도와주는 일도 주님이 기뻐하신다.
40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_마 25:40
병든 형제자매를 찾아가 보는 것도 주님이 기뻐하신다.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36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_마 25:35-36
궁핍한 사람을 도와주고 연약한 사람을 붙잡아 주며 서로 사랑하고, 어떤 고난과 역경이 있더라도 주님만 생각하고 참는 것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다. 동시에 그것은 주님의 뒤를 따르는 일이다. 구원받은 사람이 주님의 뒤를 묵묵히 따라가면 주님이 기뻐하신다. 주님을 위해서 어떤 환난이나 고난을 받고 억울하게 욕을 받아도 주님을 생각함으로 참으면 주님이 기뻐하신다. 주님이 기뻐하시든 싫어하시든 상관하지 않고 자기 기분과 감정, 생각대로 살거나 주님을 위해서 무엇인가 조금 하고 나머지는 온통 자기 방법(方法)과 고집(固執), 생각대로 살면서 어떻게 주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날 때 오늘은 ‘어떻게 주님을 기쁘시게 할꼬?’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매일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뭔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하고 잠자리에 들도록 해야 한다. 때마다 일마다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시게 할꼬?’라는 것으로 온통 생각이 꽉 차 있어야 하는 것이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하나님 앞에 뉘우치고 회개하고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찾아보아야 한다. 일단 주님을 기쁘시게 할 일이 무엇인지 알았으면 순종(順從)해야 한다.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을 주님이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자신의 수고(受苦)와 희생(犧牲), 고난(苦難), 그 어떤 것을 지불할지라도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면 무엇을 못하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마 3:17)라고 하셨고 예수님께서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 8:29)라고 하셨다.
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_히 11:5
홍수 직전에 들려 올라간 에녹은 환난 직전에 휴거 될 그리스도인들의 모형(模型)인데 들림 받기 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다. 구원받은 우리도 에녹처럼 하나님 앞에 서기 전에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받아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롬 15:3)라는 말씀처럼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기쁨을 구(求)하셨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십자가의 고난을 앞에 두고 기도하실 때 하늘에서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요 12:28)라고 하셨는데 이는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하여 세번째 들린 하나님의 음성이었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침례(浸禮)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마 3:17)라고 하셨고, 두 번째는 예수님이 변화(變化)산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계시며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서 죽으실 것을 말씀하실 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마 17:5)라고 하셨다. 자기를 보내신 아버지를 위해서 자기의 모든 것을 바치고 죽기까지 복종(服從)하기로 작정(作定)하시고 죽으셨을 때 하나님이 기뻐하셨다. 구원받은 사람들도 주님의 뒤를 따라 주님의 말씀에 순종(順從)하고 그 영광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犧牲)할 때 주님이 기뻐하신다. 우리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證據)를 받아야 한다.
② 주님의 영광(榮光)을 위한 삶이 보배로운 것이다
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_고전 10:31
그리스도인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여야 한다. 먹는 것이나 마시는 것, 장가가는 것과 시집가는 것, 직장생활 하는 것이나 농사하는 것, 장사하는 것, 사업하는 것, 이사하는 것 등 살아 움직이는 생활 모두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 영광을 구하는 것이어야 한다. 일을 계획하든지 사람을 만나 대화를 하든지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인지 아닌지를 먼저 생각하고 그것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는커녕 슬프시게 할 수 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 깊숙한 곳에 있는 동기(動機)가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榮光)을 구(求)하는 것이어야 한다.
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_갈 1:10
사람에게 잘 보이거나 좋게 하기 위해 사람에게 기쁨을 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종이 할 일이 아니다. 주님이 기뻐하시고 좋아하시는 일이라면 사람이 좋아하든 싫어하든 그것은 문제될 것이 없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이라면 오로지 그것을 위해서 자신의 남은 삶을 살아가야 한다.
2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_벧전 4:2
구원받은 사람의 남은 생애(生涯)가 얼마쯤 될까? 길게 생각하는 사람이 혹 있을지 모르지만 그리 많이 남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평생을 계산한다고 해도 얼마 남지 않았고, 연대(年代)를 따져 보아도 주님 오실 날이 너무나 가까웠다. 생각보다 더 빨리 오실 수도 있다. 주님이 재림(再臨)하시기 이전에 이루어질 징조는 우리 시대에 모두 이루어졌다. 예수님이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人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마 24:33)고 말씀하신 대로 우리는 마태복음 24장의 징조를 보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 사실을 아는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든지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준비(準備)를 하고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살아야지 이 세상에 허리띠를 풀어놓고 육신의 안일을 위해 살면 안 된다. 우리 육체의 남은 때는 오직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산 사람에게는 영원하고 영광스러운 상급(賞給)으로 갚아 주실 것이다.
③ 주님을 위해 고난받는 삶이 보배로운 것이다
17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_고후 4:17
하나님이 구원받은 사람에게 육신의 고난을 주시는 것은 더 영광스럽고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함이다. 즉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단련(鍛鍊)시키고, 영광을 받기에 합당(合當)한 자격(資格)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육신이 있는 동안에는 구원받은 사람도 많은 고난이 있고 많은 괴로움이 있다. 이 말씀을 기록한 바울 사도는 상상할 수 없는 많은 고난을 당했다. 매를 수없이 맞고 감옥에 갇히기를 수없이 하고, 헐벗고 굶주리고 자지 못하고, 먹지 못하고 춥고 떨고 그리고 마지막에 목잘려 죽었다. 그러나 이 모든 고난은 영원한 영광을 위한 고난이었다.
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_마 5:11-12
그리스도인이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나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 때문에 고난을 받는다면 그것은 복된 것이다.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13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16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_벧전 4:12-16
그리스도인들이 말할 수 없는 고통과 고난 중에 있을 때는 빨리 육체를 벗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고난은 육체가 있는 동안에 받는 것이지 육체를 벗어버리는 날은 고난이 끝나는 날이다. 마치 일터에서 일하는 사람이 빨리 고생스러운 시간이 지나 집에 가서 편히 쉬기를 원하는 것과 같다. 노동하면서 기름때나 더러운 흙이 묻은 그 작업복을 벗어버리고 깨끗이 목욕한 후 가족들과 즐거움과 안식(安息)을 누릴 시간을 사모(思慕)하듯이, 또 전쟁터에서 목숨을 내놓고 전쟁을 하는 군인이 빨리 전쟁이 끝나서 고향에 돌아가 가족들과 반가이 만날 그 날을 기다리는 것처럼 구원받은 사람은 항상 주님 오시는 날을 기다린다. 주님이 주시는 그 고난을 다 통과하고 주님 앞에 서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영광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_롬 8:18
우리를 구원해 주신 주님을 뵙고 수많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천군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의 은혜(恩惠)와 영광(榮光)을 노래하면서 사는 것도 감사한데 영원한 영광까지 주신다니! 꿈같은 이야기같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約束)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날을 사모하며 고난을 견딘다.
④ 주님을 위한 삶이 보배로운 것이다
15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_고후 5:15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삶은 다시는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주님을 위해 살아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22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23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24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_빌 1:21-24
구원받은 사람 안에 사시는 분이 그리스도이시니 이 땅에 사는 것이나 죽는 것이나 오직 주님을 위한 것이다. 육신이 아직도 살아서 주(主)를 위해서 무언가 일을 하는 것이 자신의 열매라면 좀 더 살아야 한다. 빨리 육체를 떠나서 주님 앞에 갔으면 하는 것은 소원이지만 빨리 주님 앞에 가는 것이 좋을지 좀더 살아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매를 맺는 것이 좋을 지에 대한 선택의 자유가 우리 자신에게는 없다. 바울은 살게 하시면 살고 주님이 데려가시면 더 좋다고 고백하였다. 이 두 사이 즉 죽는 것과 사는 것 사이에 끼였다는 이 말씀을 기록할 때, 바울 사도는 로마 옥중에 갇혀 있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 즉 그대로 목잘려 죽을 수도 있고 잘하면 석방될 수도 있는 상황에서,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다고 한 것이다. 마음은 육체를 떠나서 주님 앞에 가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하지만 육신에 거하는 것,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이 교회(敎會)와 많은 영혼(靈魂)을 위해서는 훨씬 유익(有益)하였다. 혹 구원받은 사람이 이 세상에 더 사는 것은 자기를 위해서 유익(有益)한데 죽는 것은 손해(損害)라고 생각하지는 않는가? 사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자기의 이상(理想)과 욕망(慾望)이 다 이루어져서 온갖 좋은 것을 다 얻는다고 할지라도 주님 앞에 가서 받을 행복(幸福)과 영광(榮光)에는 비교할 수 없다.
“나는 새 아파트를 분양 받았는데 거기 가서 살아보고 갔으면 좋겠다.” “앞으로 멋지게 한번 살려고 계획하고 있는데 그 때까지 주님이 오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난 결혼할 날을 받아 놓았는데 결혼식 하고 신혼 살림 좀 하다가 갔으면 좋겠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온갖 것이 다 있어도 천국에 갔다가 다시 세상에 가라고 하신다면 아무도 다시 오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다. 이 세상의 고생과 근심, 걱정, 고난이 다 끝나는 날, 주님 주실 영광을 사모한다면 매일매일 빨리 주님 앞에 갔으면 하는 마음에 그날을 사모할 것이다. 빨리 주님 앞에 가는 것이 나를 위해서는 좋지만 좀 더 사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나 다른 형제자매들 혹은 교회에 유익이 된다면 사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확한 계산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사는 목적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다. 자기를 위한 것같으면 빨리 주님 앞에 가는 것이 백 번 천 번 낫다. 이 땅에 사는 것은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매나 혹은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서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주님을 위해서 너무 많은 고난을 받았기 때문인지 로마에서 집행유예로 있는 2년간만 전도를 한 후 하나님이 데려가셨다.
7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_딤후 4:7-8
주님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들은 당연히 주님의 뜻대로 살고 주님을 위해 살려고 할 것이다. 그날에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대로 갚아 주실 것이고 각 사람에게 칭찬(稱讚)이 있을 것이다.
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_계 22:12
주님이 오시는 날 각 사람은 자신이 행한 대로 칭찬과 책망을 받을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악하고 게으른 종아”라는 심한 책망이 있을 것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착하고 충성된 종(從)아”라는 칭찬이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은 하나님의 즐거움에 참여하여 영광스러운 상급을 받게 될 것이다. 영광은 순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시들지 아니하는 면류관”(벧전 5:4)이라고 표현하였다. 영광(榮光)의 면류관 영원한 것이다.
⑤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보배로운 것이다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_요 13:34
주님의 사랑을 입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의 피로 구속받은 사람들을 사랑하며 주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모든 삶은 영원한 영광으로 남게 될 것이다.
21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22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_요일 3:21-22
구원받은 사람은 마음에서 스스로를 책망할 것이 없고 신앙적으로 말씀 앞에서나 양심적으로 책망 받을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 담대함을 얻는다. 만약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항상 부끄러운 것이나 책망받을 것이 있다면 빨리 고쳐야 한다. 그러면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받을 수 있다. 하나님 앞에 순종(順從)해야 할 계명(誡命)은 다름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23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_요일 3:23
즉 구원받은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고 용서(容恕)하는 것이다. 어떤 문제로 형제끼리 무슨 혐의(嫌疑)가 있으면 그리스도께서 용서하신 것 같이 용서하고, 그리스도께서 불쌍히 여김 같이 서로 불쌍히 여기고, 그리스도께서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 주님 주신 계명이다. 어떤 형제가 자기를 미워한다고 해서 자기도 미워하고, 욕(辱)하면 덩달아 욕하고, 자기의 자존심(自尊心)과 감정(感情)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주님은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威脅)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公義)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셨고 원수(怨讐)를 위해서 기도하셨다(벧전 2:23). 구원받은 사람이 모든 것을 사랑으로 대하면 주님과 같이 행하는 것이다. 스데반은 자기를 돌로 죽이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했다.
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_행 7:60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기도하신 내용과 똑같은 사랑에서 나온 것이다.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에도 마음을 넓혀 모든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과 온유(溫柔)함으로 대할 수 있다면 그것은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다. 주님의 계명들을 지키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서로 사랑하지 않고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갈 5:15)고 하셨다.
⑥ 형제를 판단하는 것을 삼가야 한다
10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11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12 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_롬 14:10-12
이 말씀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에게 하신 말씀이다. 형제가 형제를 업신여기고 판단하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책망을 받을 것이라는 것이다. 업신여긴다는 것은 마음으로 멸시(蔑視)하는 것이다. 멸시하는 마음에서는 자기 기준(基準)에 의해 남을 판단하는 죄를 짓는다. 형제자매를 평가(評價)하고 판단(判斷)하고 무시(無視)하는 것은 죄를 짓는 것이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자기들은 죄 가운데, 육신에 빠져 살면서 바울 사도까지 판단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自責)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라”(고전 4:3∼5)라고 하였다. 남을 판단하는 것은 아주 조심해야 될 일이다. 남의 신앙을 무시하고 형제를 멸시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구원받은 사람은 주님 앞에 가서 자신이 잘했느냐 잘못했느냐에 대해 심판 받을 것을 생각해야 한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심판 받을 것을 생각하면 형제를 함부로 판단하고 업신여기는 일을 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9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밖에 서 계시니라_약 5:9
원망은 어떤 문제나 잘못을 남에게 전가(轉嫁)하여 남의 탓으로 돌리며 불평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남의 잘못을 탓하고 원망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돌아보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