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죽음은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는 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육체의 생명이 끝나는 날 주님과 함께 거하게 되며 영원한 안식에 들어간다. 성경은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한평생 살아가는 육체를 집이라고  표현하였는데 그 집에는 영혼(靈魂)이 살고 있다. 그러므로 육체는 영혼이 잠깐 머물다가 가는 장막(帳幕)에 불과하다(벧후 1:14).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廣野)에서 장막을 치고 살다 언제든지 하나님이 옮기라 하시면 다른 곳으로 가야 했다. 그래서 장막은 허술하게 지어진 완전하지 못한 집이었다. 바울 사도는 육체를 장막집이라고 하였고 장막집이 무너질 때가 온다라고 말씀한 것이다. 그러나 결코 낙심(落心)하지 않는 것은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영원한 집이 있기 때문이다.

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_고후 5:1

 어미 닭이 달걀을 품고 있다가 21일이 되면 병아리가 되어 껍질을 깨고 나오는 것처럼, 구원받은 사람의 육체도 병아리가 되고 있는 달걀 껍질과 같이 육체를 입고 있는 동안에 속사람이 주님의 생명으로 점점 완전해져 가고 있다. 달걀 껍질이 깨어질 때 병아리가 자유함을 얻는 것처럼 구원받은 사람의 장막집이 무너질 때 영혼이 자유함을 얻고 영원한 나라에 들어간다. 바울 사도께서 말씀한 대로 땅에 있는 이 장막집이 어느 날 무너진다. 새 달력을 갖다 붙이며 새해가 시작되었다고 하던 날이 어제 같은데 금방 봄, 여름, 가을이 지나고, 곧 겨울이 와 한 해가 끝난다. 그러는 사이 육체는 점점  쇠퇴(衰退)하고 늙어 간다. 어린 사람들은 빨리 어른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빨리 학교를 마치고 직장 생활도 하고, 결혼을 하여 가정도 이루고 어른이 되어 자유롭게 살기를 원하는데 어른이 되면 어떤가? 할 일이 너무도 많고 고생(苦生)도 심해 육신은 점점 늙어 가면서 처량하고 한심스럽게 된다. 좋은 시절 다 지나가고 모든 것이 끝나 머지않아 죽음이 자기에게 찾아온다는 것을 알게 된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면 인생처럼 허무(虛無)하고 한심스러운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육신이 고생하고 수고하고 점점 늙고 병들고 어느날 죽을지라도 영혼은 날로 새로워진다. 잠시 후 육체를 벗어버린 후에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서 다시는 죽지도 않고 썩지도 않는 주님과 같은 신령(神靈)한 몸으로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 소망(所望)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기뻐한다. 

15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
_시 116:15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 말씀 안에서 살다가 어느 날 죽을 때 주님이 그 성도의 죽는 것을 아름답게, 귀중히 보신다. 왜 귀중히 보실까? 주님이 그 사람을 위해서 예비해 놓으신 모든 것을 주시는 날이기 때문이다. 어떤 부모가 자기 자녀가 어느 정도 크면 주려고  준비해 놓았던 보물이나 재산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을 빨리 주고 싶어하지 않겠는가? 아마 빨리 성장하기를 바랄 것이다. 주님이 사랑하는 자녀를 위해 예비해 놓으신 모든 것을 주시는 그 날 얼마나 기뻐하시겠는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위해서 예비해 놓으신 모든 영광스러운 기업(基業)을 주시는 날이기 때문에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는 귀중히 보시는 것이다.

13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_계 14:13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이 복이 있다. 이 땅에서의 그 모든 수고에 대하여 주님이 영광스럽고 영원한 것으로 갚아 주시기 때문이다. 만일 죽는 것이 무서운 사람이 있다면 자기 신앙(信仰)을 점검해 보아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조금만 추워도 추워 죽겠다고 하고, 배고프면 배고파 죽겠다, 좋아 죽겠다, 더워 죽겠다, 배부르면 배불러 죽겠다고 한다. 복권이 당첨되어 너무 좋아하다가 심장마비로 죽는 경우도 있다. 어떤 사람은 축구 팬인데 잠도 안자고 보다가 골인하는 찰라 심장마비로 죽기도 한다. 왜 그렇게 항상 죽겠다 죽겠다 하면서 죽는 것을 두려워하는지! 죽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생에 대한 애착(愛着)이 있거나 육신의 생명을 부지(扶持)하기 위해서 비겁하게 사는 경우가 많다. 

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_고후 5:8

바울 사도처럼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빨리 주님 앞에 갔으면 좋겠다는 확실한 소망을 가지고 죽음 앞에 담대(膽大)한 사람은 그 때부터 사는 목적(目的)이 확실해진다. 구원받자마자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너무 얌체라는 생각이 든다. 구원받았으니 주님을 위해서 일하다가 가야지, 어떻게 구원만 받고 금방 주님께 가려고 하는지? 주님 앞에 가서 “너 뭐하다 왔느냐?”하시면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구원받은 후 주님 앞에 갈 때까지 주님을 위해서 열심히 살아야 한다.

14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_히 2:14-15

사람은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죄(罪)에 매여 사는 죄의 종, 마귀의 종이다. 예수님은 거기서 사람을 놓아주기 위해서 육체를 입고 오셨다. 육체를 입으신 예수님이 죽음을 당하심으로 죄를 대속(代贖)하시고, 사망의 권세(權勢)를 깨치고 부활(復活)하심으로 혈육에 속한 우리를 사망의 세력에서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신 것이다.

10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_딤후 1:10

예수님이 육체를 입은 몸으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은 육체를 입은 우리를 살리시고,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자들을 해방하기 위함이었다. 우리는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죄와 마귀에 매여 종노릇하던 데서 해방된 사람들이다. 이제 다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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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옵 19:27

육체의 생명이 끝나는 날, 이 가죽이 썩어서 흙으로 돌아가는 날 구원받은 영혼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만날 것이기 때문에 죽음이 두렵지 않다. 욥은 “내가 친히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외인(外人)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급(焦急)하구나”(욥 19:27)라고 하였다. 주님을 직접 보기 위해 빨리 육체를 벗어버리고 주님 앞에 갔으면  좋겠다는 말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바울 사도도 육체를 벗어버리고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 더 좋다고 간증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옆에 같이 달렸던 강도 한 사람, 평생토록 사람을 죽이고 돈을 빼앗던 그 살인 강도는 자기가 지은 죄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순간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생겼다. 그래서 예수님께 자기 영혼(靈魂)을 부탁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樂園)에 있으리라”(눅 23:42,43). 십자가의 고난이 끝나는 날, 평생토록 죄짓고 험악하게 살다가 육체는 십자가에서 공개 처형(處刑)을 당해서 죽지만 잠시 후에 주님과 함께 낙원에 들어갈 약속을 받은 그 강도는 얼마나 기뻤겠는가? 우리도 주님과 함께 낙원에 들어갈 것을 생각하면 죽는 것이 조금도 두렵지 않은 것이다.


필자는 구원받기 전에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 어려서 초등학교에 다닐 때 6.25사변이 일어나 피난(避難)을 가다가 낙동강을 못 건너 그 강 북쪽에서 피난살이를 하였다. 피난하던 그 동네를 사이에 두고 삼 일간 아군이 진격해 오는 가운데  격전(激戰)이 일어났다. 폭탄이 가까이서 터지고 총알이 머리 위로 지나갔다. 사방에서 죽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한번은 머리를 드는데 총알이 머리 위로 핑 하고 지나가더니 바로 나무 잎사귀에 맞아서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만일 그때 죽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하면 살아 있는 것이 기적(奇蹟)같이 여겨진다. 그후 한번은 부산 송도에서 해수욕하다가 물에 빠져 죽을 뻔한 적도 있었고, 인천에서 연탄가스로 죽을 뻔한 적도 있었으며  병으로 그리고 교통 사고로 죽을 뻔한 적도 있었다. 사람에게는 자신이 알게 모르게 죽음이 스쳐 지나간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죽음을 겁내지 않는다.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갑자기 기체가 흔들리고 구름과 바다만 보일 때 ‘이제 추락할지도 모른다. 내가 만일 죽는다면 형제자매들이 서운해하겠지. 가족들은? 그러나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내가 책임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생명이 끝나는 날 나는 이대로 주님 앞에 간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번은 남해에서 조그마한 배를 타고 가는데 풍랑이 일어나서 배가 심하게 요동하고 파도가 뱃전을 넘고 온통 혼란 중에 있을 때 ‘파선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구명대가 있는 곳을 보았다. 구명조끼가 있는 곳을 확인해 두고 만일 구명조끼가 모자라면 옆에 있는 빈 플라스틱 기름통이라도  붙잡고 가야지 하다가 순간 만일 죽는다면 주님 앞에 간다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편안해지고 차분해진 적이 있었다. 이상하게도 죽는 것이 하나도 두렵지 않았다.


영국의 요한 웨슬리가 목사(牧師) 아들로 태어나서 자기도 목사가 되어 동생 찰스 웨슬리와 함께 미국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배를 타고 미국에 가는 중에 큰 풍랑을 만났다. 금방이라도 배가 뒤집히려고 하자 웨슬리는 죽음 때문에 공포(恐怖)에 질려 어쩔 줄을 모르고 있는데 배 안에서 조용히 찬송(讚頌)을 부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도 이상해서 “당신들은 무섭지 않습니까?”하고 물었더니 “우리는 무섭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배가 금방 파선할지도 모르는데 무섭지 않아요?” “예. 배가 파선하면 우리는 주님 앞에 갑니다.” 자신도 평소에 그렇게 믿고 있었는데 막상 죽음이 찾아오니 새파랗게 질려 어쩔 줄을 모르는데, 그 사람들은 편안하게 찬송을 부르는 것이었다. 그들은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었다. 웨슬리는 그때 너무나 놀랐다. ‘이 사람들의 믿음과 내 믿음은 뭔가 다르다.’ 그 때부터 자신의 구원에 의심(疑心)이 생기고 갈등(葛藤)이 일어났다. 무사히 미국에 도착지만 그때부터 자기의 구원 문제에 고민이 생겼다. 어느 날 “웨슬리, 당신은 성령이 증거하는 믿음이 있습니까?”라고 묻는 어떤 사람의 질문에 “예”하고 대답은 했지만 자기 일기장에는 ‘자신 없는 대답이었다’라고 기록하였다. 자기가 거듭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다시 영국에 돌아가서 자기의 구원 문제로 고민하던 중 동생 찰스 웨슬리가 먼저 거듭났고 얼마 후에 요한 웨슬리가 거듭났는데 그가 거듭난 것은  목사가 된지 13년 만이었다. 


아무리 잘 믿는다는 사람도 구원의 확신(確信)이 없고 천국 갈 소망(所望)이 확실치 않는 사람은 죽음이 찾아오면 무척이나 당황해 하고 어쩔 줄을 모른다. 필자는 지방에서 올라와 서울의 큰 병원에서 진단을 받는 형제자매들이나 마지막으로 최종 수술을 하는 형제자매들을 보곤 한다. 며칠 살지 못한다는 의사(醫師)의 진단이 내려지면 의사의 말을 그대로 이야기해  준다. “의사가 며칠 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의 얼굴은 오히려 환하게 밝아진다. “이제 저는 주님 앞에 갑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이 형제 자매들과 같이 웃으며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슬퍼하지 않는다.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면 우리 막내가 아직 구원받지 못했는데…. 구원받는 것을 보고 가야 하는데…. 남편이 아무리 전도해도  아직 못 깨달았는데…” 등등 구원받지 못한 자기 가족들을 염려(念慮)하는 것을 제외한 다른 염려를 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빨리 몸을 떠나서 주님 앞에 갔으면 좋겠다는 바울의 간절한 소원(所願)은 단순히 육신의 고통을 벗어버리고자 하는 것 때문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소망을 너무나 사모(思慕)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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