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사망의 법과 생명의 성령의 법

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_롬 7:22-23

바울이 고백한 바 “내 지체 속에” 있는 “한 다른 법”은 “죄의 법”을 말한다.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원하지만 변화되지 않는 옛 성품 때문에 실지로 하나님의 뜻을 행할 힘이 없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롬 7:19)라고 간증한 것이다. 선(善)이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 하지만 구원받은 사람 속에는 육신의 생각들이 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싫어하고 기회만 있으면 죄를 짓고자 하므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며 하나님을 대적(對敵)하게 되는 것이다.

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_롬 8:7

또한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지 않으려 함으로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롬 8:8). 이런 육신의 생각이 구원받은 사람 속에 있는 죄의 성품이다. 구원받은 후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면 이것이 점점  변화되어야 한다. 이러한  변화를 다른 말로 성화(聖化)라고 하는데 그것은 거룩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15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16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_벧전 1:15-16

하나님은 구원받은  사람이 자신처럼 거룩하게 되기를 원하신다. 왜냐하면 구원받은 사람은 장차 하나님처럼 영광스럽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20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_롬 7:19-20

원하는 선은 행치 않고 원치 아니하는 악을 행하면 이것을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라 라고 하신 바울 사도의 말씀에서 ‘나’는 ‘구원받은 나’, 주님 뜻대로 살기 원하는 ‘속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생명은 죄를 짓지 않는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요일 3:9). 하나님께로서 난 자, 구원받은  속사람은 죄를 짓지 않는데 이는 하나님의 씨, 즉 하나님의 생명이 그 속에 거하기 때문이다. 구원받은 사람이 하나님께 받은 생명은 죄를 짓지 않는 생명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간절히 원한다. 그러므로 죄를 짓고자 하는, 선은 행치 않고 악을 행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거하는 죄라고 함으로써 죄의 성품은 자기의 본심(本心)이 아니라고  하였다. 즉 죄의 성품을  별도로 취급한 것이다.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_롬 7:21-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는 바울의 탄식은 영혼이 멸망할까 봐 하는 탄식은 아니다. 구원을 받은 사람이 자신의 영혼이 육신에게 끌려가는 것을 보면서 하는 탄식(歎息)인 것이다. 구원받은 사람의 속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원하지만, 지체 속에 다른 법, 즉 죄의 법이 속사람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다. 그런데 법(法)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들고 있던 물건을 놓으면 떨어지는 것이 인력(引力)의 법칙인  것처럼 법은 곧 힘이다. “한 다른 법” 즉 죄의 법이 “내 마음의 법” 즉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법과 싸우는 것이다. 죄의 법도 힘이지만 내 마음의 법도 힘이다. 이 두 힘 간의 싸움의 결과,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을 이기고 자신을 그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즉 죄를 짓고자 하는 힘으로 사로잡아 가는 것을 보는 것이다. 이것은 영혼이 육신에게 끌려가는 모습을 보는 사도 바울의 탄식(歎息) 어린 간증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원하는 구원받은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이러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하지만 구원을 받은 사람은 마땅히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고 살고자 하는 마음도 있다. 구원받았다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지옥에는 안가겠지’, ‘천국에는 가겠지’라고 생각하며 구원받기 전과 동일하게 생활한다면 그리스도인에게 합당하겠는가? 그런데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데 왜 되지 않는 것인가?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_갈 5:17

‘그러면 어떻게 이 육신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을까?’라고 뉘우치고 회개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다. 구원받은 사람에게 이러한 자책(自責)하는 마음이 강하게 일어나는 것은 정상(正常)이다. 구원받기 전 죄로 지옥에 갈 것 때문에 고민했듯이, 구원받은 후에는 지옥에 갈 고민은 없어졌지만 자신의 죄성(罪性)으로 인한 고민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몸부림치는 마음이 있어야 되지 않겠는가? 그런데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원하지만 실제로는 잘 되지 않는 것 때문에 고민이 생기는 것이다. ‘왜 이럴까? 왜 안 되느냐? 아하, 내 속에 죄가 있구나. 구원은 받았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보다는 육신을 따라 사는 것이 더 많구나. 오호라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하는 탄식과 함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가? 


육신(肉身)을 사망(死亡)의 몸이라고 한 것은 “죄의 법”을 가리키고 아직도 사망의 세력이 구원받은 사람의 육체 속에 거(居)하고 있어서 역사(役事)하고 있는 것이다. 그 죽음의 세력에서 영혼은 해방되었지만 육체 속에 사망이 역사하고  있으므로 탄식하는 것이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롬 8:13) 혹은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 6:23)라는 말씀처럼 구원받은 사람이 육신을 따라 사는 그 자체가 곧 죽음인 것이다. 물론 지옥에 갈 사망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만일 구원받은 사람이 죄를 따라 살면 하나님은 육신을 죽이기까지 하실 수도 있다.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 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 얻게 하려 함이라”(고전 5:5). 구원받은 사람의 영은 멸망하지 않지만 죄를 따라 사는 육신은 하나님이 죽이기까지 하신다.


여기 또 한 가지 자기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25)라는 바울의 간증이다. 자신의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지만 육신을 따라 사는 옛 성품은 아직도 육신이 좋아하는 것을 따라 살려고 한다. 구원받았을지라도 타락된 마음은 육체 편이라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러면 속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좋아하고 육신은 죄의 법을 섬긴다고 하였으니, 속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며 성경을 배우고 기뻐하고 감사하지만 육신은 세상에서 어쩔 수 없으니 죄를 따라 살아도 좋다는 말인가? 그런 말은 아니다. 영혼이 육신을 따라 완전히 끌려가던 삶이 반대로 영이 육신을 완전히 끌고 감으로 이 두 사이의 싸움에서 영혼이 이겨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이것은 바울 사도의 간증이다. 필자도 오랫동안 이 문제 즉 ‘어떻게 이 죄에서 해방될 것인가? 내 육신 속에 있는 죄의 세력에서 어떻게 해방될 수 있을까?’하는 것이 의문(疑問)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잘 나오지 않고 들어도 잘 모르겠다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완전히 풀어졌다. 알기 쉽게 그것을 지구의 인력(引力)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우주에는 지구라는 행성이 있고 지구에는 지구의 힘이 미치는 인력권(引力圈)이라는 것이 있다. 로켓을 사용하여 우주선을 쏘아 올리면 대기권을 통과해서 우주로 나가지 않는가? 그러면 지구의 인력권을 벗어나면 그 때부터는 지구의 인력권과는 상관이 없게 된다. 아폴로 13호가 달에 가다가 고장이 나서 지구로 돌아오는데, 만일  에너지가 없어져 버리면 지구의 인력권 안으로 진입하지 못하고 우주의 미아(迷兒)가 되어 버릴 것이라고 전 세계가 긴장하고 마음을 졸인 적이 있었다. 만일 우주선이 지구의 인력권 안으로 돌아올 에너지가 없다면 어디론가 정처 없이 떠내려가 버릴 것이다. 그런데 다행히 지구의 인력권 안에 진입했고, 진입하자마자 그 우주선은 지구의 인력권 안에 있으므로 그 인력권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구원받은 사람의 영혼과 육신이 싸우는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육신의 힘보다 더 큰 힘 즉 성령의 도움이 있어야 육신의 힘을 벗어날 수 있다. 그렇다면 성령의 힘은 어떻게 오는 것인가? 이러한 것은 실제로 구원받은 사람 스스로의 노력으로는 되지 않는 일이다.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할지라도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필자가 다니던 신학교의 어떤 교수 한 분은 목사님이기도 하셨는데 별명이 바리새인이었다. 얼마나 율법을 철저히 지키려고 하는지, 죄짓는 육신은 말려 죽여야 한다며 먹지도 않고 잠도 자지 않았으며 기도하였다. 걸음도 거미처럼 겨우 간들간들하게 걷는 빼빼 마른 지독한 분이었다. 그런데 그분 방을 지나갈 때마다 라디오에서는 세상 노래가 흘러나오는 것을 들었다. 마음이 변해야지 육신을 그렇게 단속(團束)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산 속에서 손을 들고 기도하고 있는 사람에게 “당신 지금 왜 그러고 있소?”라고 물었더니 “이 손이 하도 죄를 짓고 나쁜 짓을 해서 길을 들일려고 기도하고 있다”라고 하였다 한다. 그래서 “여보시오. 당신 마음을 고쳐야지 손을 길들인다고 되겠소?”라고 대답하니 “무엇이 어째?”하면서 때리려고 하기에 “보시오. 그러니 어떻게 당신 손을 길들이겠소?”고 말해 주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 노름을 해서 재산을 다 잃은 사람을 다시는 못하게 하려고 손가락을 다 잘라 버린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손가락을 자르면 어떻게 노름을 하는지 아는가? 남아 있는 손가락 사이에 화투를 끼워 노름을 한다고 한다. 손을 다 자르면 아마 발가락 사이에 끼워서 할지도 모른다. 마음을 고쳐야지 손가락을 자른다고 되겠는가? 어떤 구두 깁는 사람이 길가에 앉아 구두를 깁는데 눈이 하나  없기에 “아저씨, 왜 눈 한쪽이 없어요?”하니까 “내가 구두를 깁는데 멋진 아가씨들이 짧은 치마를 입고 지나가는 것을 자꾸 보고 죄를 짓기 때문에 ‘요놈의 눈!’하고 송곳으로 콱 찔러 버렸다”라고 하더랍니다. 아니 그러면 그쪽 눈으로만 보았단 말인가? 오른쪽 눈을 찌르면 왼쪽 눈은 가만히 있는가? 주님은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마 5:29,30)라고 하셨다. 그러나 오른눈을 빼어 버리면 왼쪽눈은 가만히 있는가? 오른손이 범죄 하여 잘라 버리면 왼손은 범죄하지 않는가? 그런 식으로 한다면 사람의 몸 중에 남는 것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자르거나 빼거나 해도 되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이 아주 온몸으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다. 한 눈 가지고 천국 가는 것이 낫다고 하니까 진짜 눈을 빼서라도 천국에 가려는 사람도 보았다. 그러나 사실은 눈을 빼거나 손을 자른다고 될 일이 아니다. 먼저 마음을 고쳐야 되는 것이다. 금식하고 기도하고, 성경을 많이 배우고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고, 죄를 지으면 주먹으로 때리고 벌을 준다고 될 일이 아니다.

읽어 오는 중...
처리 중...
text_sending
검색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