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들
①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만난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자신을 인간에게 나타내시지만 사람도 성경을 통해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 말씀 속에서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것이다. 교회당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도 아니고, 산에 가서 혼자 기도하다가 하나님을 만나는 것도 아니다. 오직 하나님은 성경 말씀을 통해서 만난다.
6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_사 55:6
사람은 하나님을 만날 만한 때가 있다. 만날 만한 때, 가까이 계실 때는 언제인가? 그것은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확실한 말씀이 나타날 때이다.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 10:14). 어떤 사람이 믿을 수 있는 확실한 성경 말씀을 전해 줄 때가 주님이 가까이 계실 때이다. 어떤 방법으로든지 믿을 수 있는 확실한 말씀이 증거될 때 그 때가 주님이 가까이 계실 때이다. 그런 말씀이 없는 가운데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27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큰 권세가 있는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28 돌아 가는데 병거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29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병거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30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뇨31 대답하되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뇨 하고 빌립을 청하여 병거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_행 8:27-31
에티오피아에서 예루살렘까지 왔다갔다하면서 예배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에티오피아 여왕의 국고를 맡은 재무 장관으로서 큰 권세가 있는 내시였는데 대개 여왕을 섬기는 내시는 거세(去勢) 당한 사람들이었다. 큰 권세가 있었지만 육신으로는 이 세상의 행복도 즐거움도 모르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이 에티오피아 사람이 어째서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하나님께 예배를 하고 돌아가겠는가? 옛날 에티오피아 여왕이 솔로몬에게 다녀간 후 에티오피아 사람들 중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시작된 것이다. 그는 예루살렘까지 왔다가 돌아가는 도중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고 있었다. 그 당시에 예루살렘에는 제사장과 장로들, 율법사들, 종교가들 등 하나님을 섬긴다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사람들이었다. 그는 예루살렘까지 와서 하나님의 아들을 배척하여 죽이고 복음을 대적(對敵)하는 그 사람들에게 가서 예배를 하고 에티오피아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물론 이 예배(禮拜)는 자기 아버지를 때려죽인 사람에게 절하고 가는 격이므로 잘못된 것이다. 지금도 이런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무조건 교회당에 찾아가거나 종교가들에게 가서 예배를 하고 말씀을 듣지만 그 사람들 속에 정말 진리(眞理)와 생명(生命)이 있느냐가 문제이다. 아니면 혹 그들도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복음을 대적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무조건 교회당에 가서 예배 의식에 참석하면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잘못된 것이다. 이 에티오피아 내시도 그렇게 멀리서 마차를 타고 예루살렘까지 와서 예배하고 돌아가지만 마음은 답답했을 것이다. 하나님이 보실 때 이 사람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찾는 순전한 마음이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고 있었다. 그 속에 진리를 찾고자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집사 빌립을 보내신 것이다. “여보시오. 당신, 성경을 읽고 있는데 읽는 것이 깨달아집니까?” 이 내시는 멋진 마차를 타고 신하들을 거느리고 예루살렘에 가서 대제사장들과 종교가들만을 상대하고 돌아가는데, 광야(廣野)에서 초라한 청년이 나타나 따라오면서 읽는 것을 깨닫느냐고 했을 때 아마 그가 보통 사람이었다면 기분이 좋지 않았을 것이다. 혼자 책을 읽고 있는데 누가 와서 읽는 것이 깨달아지느냐고 물으면 기분이 어떻겠는가? 그것도 대학 교수님 같은 분이 물으면 괜찮을 텐데 자기보다 못한 것 같고 초라한 사람이 물으면 기분이 좋을 리가 만무하다. 만약에 이 내시가 “깨닫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저리 가. 꺼져!”라고 했다면 영원히 그 영혼이 하나님 앞에 잃어졌을 것이다. 확실히 믿을 수 있는 말씀을 전해 줄 수 있는 사람이 가까이 왔을 때가 하나님이 가까이 계실 때인데 만일 그를 쫓아 버리면 영영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했으면 이 내시는 에티오피아에 내려갔다가 얼마 후에 또 예루살렘에 와서 예배했을 것이고, 그 예배를 반복하다가 결국 지옥으로 갔을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은 너무나 간절하게 진리를 찾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읽는 것을 깨닫느뇨?”라는 물음에 “지도(指導)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뇨?”라고 대답했다. 자물통이 있기는 있는데 열쇠가 없으니 안 열린다는 말이다. 천국문에는 자물통이 하나 달려 있는데 그것은 열쇠가 없이는 절대 열리지 않는다. 그래서 예수님은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눅 11:52)라고 말씀하셨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詳考)하거니와”(요 5:39)라는 말씀처럼 성경이 열려야만 영생을 얻고 천국문이 열리는데 이 유대 종교가들은 이 지식의 열쇠를 감춰 버린 것이다.
35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36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뇨_행 8:35-36
말씀을 들은 내시는 마차 위에서 즉시 복음을 깨달았다. 깨닫자마자 물 있는 곳에서 가서 침례를 받고 헤어졌다. 내시는 하나님이 주신 적절한 기회를 잘 받아들임으로 하나님을 만났으며 구원을 얻은 사람의 대표적인 모습이다.
② 말씀은 사람을 거듭나게 한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_요 5:24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데 이는 성경에서 증거하는 그리스도를 깨달음으로 된다. 성경 말씀을 통해서, 정말 간절하고 순전한 마음으로 말씀을 들을 때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 역사(役事)하신다. 습기와 온도가 적당한 부드럽게 된 흙에 씨앗이 떨어지면 싹이 나듯이, 간절하고 솔직하며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할 때 말씀이 떨어져 싹이 난다.
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_벧전 1:23
벧전 1:25
18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_약 1:18
하나님은 말씀으로 거듭나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다.
③ 성경은 영적(靈的)으로 성장(成長)하게 한다.
성경 말씀은 사람을 영적으로 탄생하게 할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을 자라게도 한다. 탄생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올바로 자라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구원받은 이후에 각 사람이 성장하는 것 역시 말씀으로만 가능하다.
2 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_벧전 2:2
이 말씀은 거듭난 사람들에게 하신 것이다. 여기에서 “순전하고 신령한 젖”은 말씀을 가리킨다. 각 사람의 신앙이 성장할 수 있도록 말씀을 읽고 듣고 배우는 과정에서 풍성한 은혜와 생명이 공급된다. 구원받은 사람이 말씀을 배울 때 그 사람의 신앙이 자라는 것이다. 자란다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과 생활이 변화(變化)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사랑과 인격이 각 사람의 마음과 생활 속에 이루어져 가는 것이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充滿)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 1:16)라는 말씀처럼 계속 하나님의 은혜를 공급받아야 한다. “더 주고 더 주네 항상 더 주시네 은혜 풍성하시나 항상 더 주시네”(찬송가). 은혜로 구원은 받았지만 구원받은 이후에도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주시고자 원하시는 풍성한 은혜가 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벧후 3:18)라는 말씀처럼 주님을 점점 더 알아가야 한다. 바울 사도는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有益)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害)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高尙)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 버리고 배설물(排泄物)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 3:7∼9)라고 하였다. 구원받은 사람은 성경을 통해 주님을 점점 더 배워간다. 구원받은 이후 말씀을 통해서 주님을 더욱 알아 간다. 주님이 얼마나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분인지, 얼마나 사랑이 충만하신 분인지, 왜 우리를 구원하셨는지를 성경을 통해서 점점 알아 가고, 주님을 아는 만큼 각 사람의 마음속은 주님으로 가득 채워진다.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라는 말씀처럼 구원받은 사람은 성경말씀을 배우는 가운데 자신의 신앙이 자라야 한다.
④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한다.
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_딤후 3:16-17
성경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탄생하는 것처럼 성장(成長)하고 성숙(成熟)하는 과정도 역시 말씀을 통해서 가능하다. 즉, 성경 말씀을 듣고 깨달음으로 구원을 받을 뿐 아니라 구원을 받은 후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되는 것도 말씀을 통해서이다. 구원을 받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또 “너 하나님의 사람아”(딤전 6:11)라는 말씀하신 것 같이 하나님의 사람이 된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더욱 온전케 되어야 한다. 아버지가 훌륭하고 존귀하다고 해서 아들도 반드시 저절로 훌륭하고 존귀한 것은 아니다. 어린아이일 때는 똥오줌을 싸면서 말썽도 부리지만 점점 자라면서 아버지에게 배워 온전케 되어 간다. 옛날 왕의 아들로 태어난 사람은 엄한 교육을 받았다. 왜냐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왕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세자(世子)가 되고 임금자리에 오를 존귀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아무렇게 행동할 수가 없다. 왕이 될 수 있는 모든 인격(人格)을 갖추어야 되므로 엄격한 교육을 받는다. 구원받은 사람도 하나님의 자녀가 됨으로 말미암아 영광스러움뿐 아니라 큰 책임까지 있으므로 점점 온전(穩全)하게 되어야 한다.
구원받기 전 우리 각 사람은 마음과 생활 속에 말할 수 없는 많은 죄로 인하여 영혼이 멸망 받을 수 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 있었던 비참한 죄인들이었지만, 구원을 받은 이후에는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리를 점점 변화시켜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시고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신다. 먼저 사람의 인격이 형성(形成)되어야만 정상적인 행동이 나오므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인격을 형성시키는 것이다. 마음속의 인격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선하게 살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제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일시적(一時的)으로는 선하게 살거나 아주 경건(敬虔)한 모습이 가능할지 모르지만, 금방 본색(本色)이 드러나게 된다. 마음에서 이루어져야만 자연스럽게 밖으로 나오고 또 그 모습이 시종일관(始終一貫) 변함이 없다. 그것은 속 사람의 인격이 말과 행동으로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된 후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도 온전하게 된다. 구원받은 사람이 ‘이제 지옥은 가지 않을 테니 아무렇게 살아도 괜찮다’라는 생각을 할 수는 없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영원한 천국에 들어갈 사람이 아무렇게나 살아도 괜찮다는 말이 어떻게 합당하겠는가?
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_살전 4:3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심은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벧전 1:16)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될 수 있으며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겠는가?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⑤ 성경은 사람을 교훈(敎訓)하고 책망(責望)하고 바르게 하고 의(義)로 교육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므로 성경을 통해서 주님을 배우게 된다. 주님이 얼마나 거룩하시고 영광스러운 분인지,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배워 가는 동시에 책망도 받는다.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발견하는 동시에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구원받기 전에 죄를 발견하는 것은 그로 인해 지옥 갈 자신의 운명을 아는 것이지만, 구원받은 이후 성경을 통해서 받는 책망은 마음과 생활 속에서 하나님 앞에 잘못된 것들이 전부 드러나는 것이다. 성경을 배울 때 마음에 찔림과 책망을 받는다. 말씀을 들을 때 ‘나 들으라고 하는 것이지. 어떻게 내 마음을 알고 저런 말을 할까? 누가 일러주었나 보다’라고 생각하고 문제를 삼는 사람이 혹 있는데, 필자는 그런 사람에게 “그럼 자기 들으라고 했지. 누구 들으라고 했답니까?”라고 말해 주고 싶다. 말씀은 모두 자기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각자 자기 마음에 찔림과 책망이 있으면 그것이 주님께로부터 온 책망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책망하시기 때문에 그 책망을 달게 받아야 한다.
하나님은 자기 자녀들을 말씀으로 책망하고 바르게 한다. 잘못된 것을 지적해 줄뿐 아니라 고쳐 주신다. 말씀을 배우는 가운데 책망을 받고 고침을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을 배우지 않으면 고쳐질 수가 없다. 하나님 앞에 정상적으로 고쳐서 점점 그 사람을 의(義)로 교육하신다. 그래서 지옥 갈 죄인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되고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점점 변화되어서 얼마 후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資格)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이다. 구원받았으면 물론 천국에 간다. 그러나 그 사람의 마음과 생활 속에는 천국에 들어가기에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죄가 있으므로 그것이 변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자마자 당장 천국에 데려가기를 원하시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구원받은 이후 그 사람의 마음과 생활이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되는 과정이 필요하고 주님을 위해 살아가는 생애(生涯)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의 마음과 생활을 변화시키는 능력(能力)이 있다. 그러므로 성경을 열심히 배워야 한다.
⑥ 말씀은 사람을 거룩하게 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날 “저희를 진리(眞理)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17:17)라고 기도하셨다.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保全)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요 17:15). 하나님은 구원받은 우리를 이 죄 많은 세상에서 당장 데려가는 것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 죄 많은 세상에 살면서도 그 죄 가운데 빠지지 않고 보존되기를 원하신다. 어떻게 보존되겠는가?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구원받은 우리의 마음과 생활을 점점 거룩하게 하시고 보존하신다.
예수님은 죄인의 집에 가셔서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고 창기나 세리나 그 밖의 많은 죄인들을 가까이 하시고 말씀을 증거하셨지만 그들의 죄와는 멀리 떨어져 있었다. 창녀에게 전도하려면 창녀와 같이 살면서 전도해야 될 것 아니냐 라고 말하는 사람이 혹 있다. 창녀에게 전도하기 위해서 창녀 소굴에 들어가서 어울리면 그들이 구원받겠는가? 술꾼들에게 전도하기 위해서 같이 술을 마시고 취하여 어울리면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겠는가? 전도하기 위해서 죄 많은 사람들을 가까이 하고 그들과 대화를 해야 되지만, 우리의 마음과 생활은 그 죄에서 깨끗이 구별(區別)되어 있어야 한다. 죄 많은 세상에 살면서 죄 가운데 빠지지 않으려면 우리의 마음과 생각들이 거룩해져야 한다. 거룩이라는 말은 구별된 것을 말한다. 말씀을 읽고 듣고 외우고 생각하는 동안 성령(聖靈)께서는 그 사람의 마음과 생활을 점점 거룩하게 하시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는 지옥 갈 죄인을 거룩하게 하셨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의 전과(前科)를 모두 지워 버렸고 죄를 하나도 짓지 않은 사람처럼 만들어 주셨다. 그러나 구원받은 이후에는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과 생활을 변화시키고 죄의 세력에서 구별시킨다. 말씀 배우기와 듣기와 읽기를 등한히 하면서 어떻게 그 마음이 변하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구원받은 이후에 몇 년이 지나도 마음과 생활이 잘 변화되지 않는 사람이 있다. 그 이유를 살펴보면 말씀을 등한히 하는 경우가 많다. 말씀을 등한히 하면 변화될 수가 없는 것이다.
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_엡 5:26-27
주님은 우리를 물로 씻는 것 같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신다. 만일 우리가 살아가는데 물이 없다고 생각해 보자. 갑자기 수돗물이 나오지 않고 물을 구할 수 없으면 심각한 문제들이 발생한다. 물이 없다면 화장실을 사용할 수 없을 것이며 몸을 씻을 수 없고 냄새나는 옷도 세탁할 수 없을 것이다. 구원받은 사람에게 말씀이 없다면 꼭 이와 같다. 육신은 씻고 또 씻어 깨끗하게 하면서 왜 마음과 생활은 씻을 줄을 모르는가? 물로 씻는 것 같이 말씀으로 자신의 마음과 생활을 깨끗하게 해서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해야 한다. 요한복음 13장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발을 씻겨 주신 일이 기록되어 있다.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라고 했을 때, 주님은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라고 하셨다. 그때 베드로는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라고 하였지만 주님은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고 하셨다.
말하자면 구원받는 것은 목욕하는 것과 같다. 아침에 목욕을 했어도 발은 저녁에 다시 씻고 자야 한다. 발은 땅과 항상 접촉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특히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발은 지금 우리와 같은 신발이 아니라 샌달이었기 때문에 팔레스타인의 그 먼지 나는 곳에서는 잠깐만 밖에 나가더라도 즉시 발이 더러워졌고 집에 들어올 때엔 부지런히 발을 씻어야 되었다. 우리도 세상에 사는 동안 마음과 생활 속에 알게 모르게 죄가 묻어 들어온다. 죄는 우리의 마음속에서 나오기도 하고 밖에서 들어오기도 한다.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속에서 나오는 죄와 밖에서 묻어 들어오는 죄가 쉼 없이 있는데 어떻게 깨끗케 될 수 있는가? 성령께서는 말씀으로 구원받은 우리를 점점 깨끗하고 거룩하게 하시는데 말씀이 없으면 성령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어머니가 아들을 아무리 씻어 주려고 해도 물이 없으면 씻겨 주지 못하듯이 주님이 우리를 깨끗하게 해 주시려고 해도 우리가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으면 주님은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수가 없다. 주님은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하고자 하신다. 구원받을 때는 지옥에 갈 비참한 죄 가운데서 구원받았지만, 하나님 앞에 설 때는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그런 것이 없이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교회, 그리스도의 신부(新婦)로 세우기를 원하신다. 결혼식을 하는데 신랑이 정말 잘 생기고 인격도 훌륭하다면 신부도 거기에 어울리게 단장되어야 한다. 신랑은 참 멋지고 훌륭한데 “신부 입장!”해서 보니까 석 달을 목욕조차 안 했다면 어떻겠는가? 머리는 미친 사람처럼 하고 다 떨어진 옷을 입고 먼지를 펄펄 날리면서 들어온다면 식장(式場)에 참석했던 사람들이 기겁을 할 뿐 아니라 신랑도 놀라서 그만 도망가 버릴 것이다. 주님은 얼마나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분인가! 주님은 신랑이고 그리스도인들은 그 신부인데, 우리가 주님 앞에 설 때 어떤 모습으로 서야 될까?
그러므로 구원받은 이후에 주님 앞에 서기에 합당한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해, 티나 주름잡힌 것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서기 위해서 말씀으로 깨끗하고 거룩하게 되어야 한다. 말씀은 구원받은 사람의 마음과 생활을 점점 변화시키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말씀을 배우며 한 달이 지나고 두 달, 1년, 2년, 3년이 지나는 가운데 변화가 일어난다. 구원받은 직후에는 구원은 받았지만 마음과 생활 속에 아직 복잡한 것들이 얽혀 있는데 얼마 지나면 자신도 모르게 변화된 모습을 발견한다. 주님이 말씀으로 그렇게 변화시키신 것이다.
⑦ 하나님의 말씀은 역사(役事)하는 능력이 있다.
13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_살전 2:13
성경이 말씀하는 것을 어떤 목사의 말이라 생각하면 안 된다. 성경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각하지 않고 사람이 지어낸 말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문제지만, 사람이 마음대로 지어낸 말을 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아는 사람도 문제이다. 성경과 다른 말을 해도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인 줄로 착각하는 사람이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전해도 하나님 말씀으로 받지 않고 사람이 지어낸 말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성경을 올바로 전할 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것이 믿음이다. 하나님 말씀을 하나님 말씀으로 참으로 마음에 받아들이고 간직할 때, 그 말씀을 즐거워하며 주야(晝夜)로 묵상(默想)하고 마음과 생활 속에 연결시킬 때 그 말씀이 믿는 자 속에 역사한다.
15 그 명을 땅에 보내시니 그 말씀이 속히 달리는도다_시 147:15
하나님의 말씀은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 속에 역사하여 마음과 생활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 이 우주도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있다. “여호와여 주의 말씀이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섰사오며... 천지가 주의 규례(規例)대로 오늘까지 있음은 만물이 주의 종(從)이 된 연고(緣故)니이다”(시 119:89,91). 하나님 말씀에 하늘이 굳게 서 있다는 것은 이 우주의 법칙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뜻이다.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히 1:3). 태양도 지구도 어떤 힘에 붙잡혀 있다. 태양과 지구의 거리는 1억 5천만 킬로미터인데 지구는 그 거리를 유지하면서 시속 십만 팔천 킬로미터로 우주를 달리는 엄청난 힘이 있는 것이다. 자동차는 시속 100킬로미터, 120킬로미터, 180킬로미터 이상 달리기도 하는데 여기에 많은 에너지가 소요(所要)된다. 그런데 이 지구가 시속 십만 팔천 킬로미터로 달리려면 얼마나 더 큰 힘이 필요하겠는가? 그 힘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고 운행케 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또한 구원받은 우리의 마음과 생활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는 것이다. 구원받은 이후에는 다시는 죄를 짓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아직 우리의 마음속에 변화되지 않은 옛 성품이 있으므로 때때로 실수할 수도 있고, 또 어떤 시험(試驗)을 받을 수도 있지만 물론 그것은 정상이 아니다. 마음이 변하고 신앙이 성장하면 자기 육신에서 나오는 죄도 이길 수 있어야 되고 밖에서 오는 시험과 유혹(誘惑)도 이겨야 한다. 그래서 점점 죄를 짓지 않고 적극적으로 순종하는 생활을 할 수 있어야 한다.
⑧ 죄에서 구별(區別)되는 힘을 준다.
구원받은 사람이 어떻게 죄를 짓지 않는 생활을 할 수 있을까?
9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_시 119:9
청년뿐 아니라 각 사람의 행실은 말씀으로 깨끗케 된다. 특히 청년의 때는 가장 혈기(血氣) 왕성하고 발랄하며 인생의 가장 아름답고 귀한 시기이지만, 동시에 죄도 많이 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젊음과 인생을 즐기고 자기 마음에 원하는 대로 눈으로 보는 대로 행동하고자 하는 모든 일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경고하셨다(전 11:9). 그런데 사람이 어떻게 죄를 짓지 않고, 행실을 깨끗케 할 수 있겠는가? 말씀으로 가능하다.
11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_시 119:11
구원받은 사람이 죄를 짓지 않으려면 먼저 말씀을 마음에 두어야 한다. 성경책을 가방 안에만 넣어 놓지 말고 마음에 새겨야 한다. 마음에 두려면 읽고 배우고 외우고 그 말씀을 생각해야 한다. 말씀을 마음에 두면 그 말씀이 죄를 짓지 않게 해 준다. 예를 들면 어떤 욕심이 들어오면 말씀이 마음에 있는 사람은 “욕심(慾心)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長成)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라는 말씀으로 물리치는 것이다. 세상의 사치(奢侈)와 허영(虛榮)이 가까이 오면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롬 12:2)라는 말씀으로 물리칠 수 있다. 청년이 성적(性的)으로 유혹을 받을 때는 “청년의 정욕(情慾)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딤후 2:22)라는 말씀을 따라 피하면 된다. 말씀이 마음에 있는 사람은 그때 그때 성령께서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죄 가운데 빠지지 않도록 지켜 주신다.
말씀이 마음에 없는 사람은 죄를 이길 수 있는 힘이 없다. 속에서 나오는 유혹이나 밖에서 들어오는 시험도 이길 힘이 없어서 넘어진다. 말씀이 마음에 있으면 말씀이 그 사람을 시험에 넘어지지 않도록 지켜 준다. 죄를 짓지 않으려면 말씀을 열심히 배우고 마음에 새겨야 한다. 우리가 사람에게 죄를 짓는 것은 먼저 주님께 죄를 짓기 때문이다. 주님께 죄를 짓는다는 것은 마음이 주님을 떠나는 것이다. 주님과 자신이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하면 사람을 향해서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다. 주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사람을 참으로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주님 앞에 진실한 사람은 사람 앞에 진실할 수 있다. 주께 범죄치 않는다는 것은 주님 앞에서 내 마음이 떠나지 않고 진실한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말씀을 마음에 두고 간직해야 한다.
133 나의 행보를 주의 말씀에 굳게 세우시고 아무 죄악이 나를 주장치 못하게 하소서_시 119:133
행보라고 하는 것은 발걸음이다. 구원받은 사람의 신앙생활은 주님의 말씀을 따라 한 걸음씩 조심스럽게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과 생활을 말씀 위에 굳게 세워 주시길 기도해야 한다. 구원받은 사람의 마음과 생활이 말씀과 상관없다면, 말씀을 떠나서 산다면 그것이 죄이다. ‘서자서 아자아(書者書 我者我)’라는 말처럼 성경은 성경대로 이고 나는 나대로 라면, 성경을 읽고 외우고 설교할 때 듣기만 하는 것이지 마음과 생활 속에는 연결시킬 필요가 없다는 사람이며, 그 사람은 하나님과 관계가 없다 할 것이다. 그러므로 각 사람은 주님의 말씀에 자신의 발걸음을 굳게 세워 주시고 아무 죄악이 자신을 주장치 못하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해야 한다. 시편 119편을 읽어보면 “말씀”이란 말이 계속 나온다. 주님의 말씀으로 날 지켜 주시고, 주님의 말씀 가운데로 나를 행하게 해 주시고, 아무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해 주시고, 많은 사람들이 나를 훼방하고 미워하나 나는 말씀을 지키리이다 등등의 말씀은 모두가 주님의 말씀 가운데 살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기도이다. 말씀이 우리를 죄 가운데 빠지지 않게 지켜 주도록 우리도 마땅히 그렇게 기도를 해야 할 것이다.
⑨ 말씀은 마음에 평안(平安)과 기쁨을 준다.
말씀은 구원받은 사람의 마음에 참 평안과 기쁨을 준다. 말씀을 가까이 하면 마음과 생활 속에 시험과 고난, 역경과 환난이 닥쳐도 그것 때문에 넘어지거나 실망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참 평안과 기쁨과 안식을 누릴 수 있다.
4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_롬 15:4
“전에 기록한 바”란 성경을 말한다. 물론 구약 성경을 가리키지만 또 후에 기록된 말씀도 마찬가지이다. 그 기록들은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 아브라함이 역경과 시험, 그리고 여러 환난 중에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말씀 가운데 꿋꿋이 살아가는 가운데 얼마 후 하나님의 약속대로 축복이 임하는 것들을 배우며 우리는 소망을 가지게 된다. 요셉에게도 많은 환난과 시련이 있었지만 결국 하나님이 요셉을 높여 귀하게 쓰셨다. 모세도 그랬고 엘리야나 많은 주님의 선지자(先知者)들, 주님 안에서 살았던 믿음의 선진(先進)들이 고난과 역경 중에서도 주님의 약속을 의지하고 살아갔다. 우리는 그런 것을 배우는 가운데 교훈을 받고 인내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살아갈 수 있다. 어떤 시험과 역경 중에도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는 인내심, 마음속에 안위 즉 평안 가운데서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이 자신에게 허락하시는 소망을 가지게 되는 것은 말씀을 통해서이다. 말씀이 없으면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시험과 고난과 역경을 이길 수가 없다.
16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_렘 15:16
“주의 이름으로 일컫음을 받는 자”는 주님의 자녀, 그리스도의 사람, 하나님의 사람이다. 성경을 배우는 것을 말씀을 먹는다고 표현한 것이다.
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_마 4:4
밥은 입으로 먹지만 말씀은 마음으로 먹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영혼의 양식(糧食)이라고 하지 않는가? 주님의 말씀은 영혼의 양식인 동시에 마음에 기쁨과 즐거움이 된다. 그리스도인들은 무엇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는가? 세상 사람들은 먹고 마시며 좋은 옷을 입거나 좋은 집에 살면서 육신의 즐거움으로 기뻐하겠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심령(心靈)의 즐거움이 있다. 육신은 아무것도 없어도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할 수 있다. 하박국 선지자는 이렇게 말하였다.
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18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_합 3:17-18
그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주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였다. 우리도 구원받자마자 그 기쁨이 있다.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어도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그 나라에 들어갈 것을 생각하면 그보다 더 큰 기쁨이 없다. 구원받은 사람 속에도 아직 변화되지 않은 옛 성품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에 세상일들이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으면 괴로워하거나 열등의식(劣等意識)을 가지고 불안해하고 근심하기도 한다. 이것들을 이길 수 있는 힘도 역시 말씀이다. 말씀은 우리 마음속에 즐거움을 준다. 이 세상 사람들이 가지지 못한 진정한 주님의 사랑과 생명, 하나님의 은혜와 약속을 받았음으로 기뻐하는 것이다. 주의 말씀은 구원받은 사람의 마음에 기쁨과 즐거움이다. 마음속에 기쁨과 즐거움이 없어져 버리면 우리는 세상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있다. 그러므로 말씀을 마음에 두고 주님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한다.
⑩ 말씀은 우리로 곤난과 시련을 이기게 한다.
50 이 말씀은 나의 곤란 중에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음이니이다_시 119:50
곤고(困苦)하며 어려운 일을 당하거나 절망 중에 처해 있는 사람에게 사람은 그를 위로할 수가 없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그 사람을 위로할 수 있다. 곤란한 중에, 절망 중에서는 말씀에서 위로를 얻으려고 하면 주님의 위로가 있다. 지옥에 갈 우리 각 사람의 영혼을 살리신 것도 말씀이지만 생활 속에서 용기와 힘을 주어 올바로 살게 하시는 것도 말씀이다. 실망 중에 있던 사람, 사람에게 버림을 받아서 시련 중에 빠져 있는 사람, 사업에 실패해서 곤고한 중에 있는 사람, 답답한 중에 있는 사람도 말씀에서 새로운 기쁨과 용기를 얻고 그 모든 것에서 이길 수 있다. 말씀을 가까이 하면 어떤 고난과 역경이 있어도 하나님이 그로부터 일으키시고 건지신다.
9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_시 119:92
주님의 법이라는 것은 말씀을 가리킨다. 우리는 모두 죄로 인하여 이 세상의 시험과 고난 중에 살던 사람들이다. 주님이 우리를 거기서 살리셨고 주님의 말씀이 마음의 즐거움이 되었다. 만일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붙잡아 주지 않았더라면, 마음속에 기쁨과 소망이 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우리가 당한 고난과 죄 가운데서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얼마 전에 목성에 부딪혔던 혜성(彗星)이 있었다. 지구가 궤도(軌道)를 가지듯이 목성이나 화성, 토성 등 그 밖의 다른 행성(行星)들도 다 자기 궤도가 있는데 궤도 없이 그냥 떠도는 별들도 있다. 그래서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에 돌아갈 유리(流離)하는 별들”(유 1:13)이라는 말씀처럼 이 떠돌이별들은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다가 다른 행성들과 부딪히기도 하고 또 어떤 인력권(引力圈)에 빨려 들어가기도 하고 혹 블랙홀이라는 캄캄한 흑암에 들어가기도 한다. 떠돌이별은 블랙홀에 가까이 가면 블랙홀의 힘에 빨려 들어가 사라져 버린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구원받기 전에는 각기 제 길, 자기 고집과 욕심대로 하나님을 등지고 살았다. 하지만 “너희가 전에는 양(羊)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牧者)와 감독(監督)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error_시 110:103
구원을 받으면 주님의 말씀이 꿀처럼 달게 느껴진다. 연애 소설을 읽으라고 하면 잠도 안자고 눈이 초롱초롱 해서 밤을 새우던 사람도 성경책을 읽자고 하면 왜 그렇게 재미가 없는지, 쓸개처럼 쓰다면 문제가 있는 것이다. 밥맛이 없으면 그 사람은 병이 난 사람이다. 말씀을 읽기 싫고, 듣기 싫으면 완전히 병든 사람이다. 말씀을 읽으면 재미있고, 배우면 시간가는 줄 모르고, 외워서 좋은 사람은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이다. 말씀은 읽고 배우고 외워야 한다. 그러면 말씀이 재미가 있고 말씀을 맛있어 하는 사람은 건강한 사람이다. 밥보다 좋은 보약이 없다는 말처럼 밥을 잘 먹는 사람은 건강한 사람이다. 말씀을 잘 먹으면 속사람이 건강해진다. 속사람이 건강하면 육신을 이기고 죄도 이기고 마귀도 이긴다. “달고 오묘한 그 말씀 생명의 말씀은”(찬송가). 성경을 읽으면 시간가는 줄 모르는 사람은 건강한 사람이다. 성경을 하루에 3장 정도는 꼭 읽어야 한다. 밥은 하루에 한 끼만 굶어도 배가 고파 찾으면서 왜 말씀은 읽으려고 하지 않는가? 성경에 맛을 들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165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저희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_시 119:165
주의 법, 말씀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다. 주님 말씀을 사랑하고 사모하는 자, 말씀을 믿고 마음에 간직하며 순종하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큰 평안이 있다. 주님이 같이 계신다는 것과 주님의 약속, 소망이 있기 때문에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당황하거나 실망하거나 절망하지 않는다. 가난이나 시험이 닥쳐도, 병들거나 죽음이 눈앞에 다가와도 마음속에 있는 평안은 없어지지 않는다. 그 큰 평안을 빼앗아 갈 수 있는 장애물은 아무 것도 없다. 말씀은 마음속에 확신과 평안과 기쁨을 준다.
⑪ 말씀은 하나님과 동행(同行)하게 한다.
신앙생활은 에녹처럼 하나님을 가까이 하여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과 가까이 하여 동행할 수 있겠는가?
28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_시 73:28
구원받은 사람의 복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다. 마음과 생활 속에 주님을 가까이 함이 무슨 복인지 하나님을 가까이 한 사람들은 알 것이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사람에게 있는 복은 먼저 구원받지 못한 자기의 가족들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사람은 친척들, 이웃 사람들 등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가까이 인도할 수 있다. 가족들과 친척, 이웃 사람들이 나를 통해서 구원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결과로 다른 영혼이 구원을 받는 것이다. 또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주님이 같이 계셔서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고 모든 사정을 다 아시므로 모든 생활을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시고 도와주신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잘 아는 주님 늘 돌보아 주실 것을 내가 확실히 아네”(찬송가). 구원받았지만 그 옛날 십자가에서 구원해 주신 주님, 지금은 저 하늘나라에 계신 주님으로만 생각하면 너무너무 멀리 계신 분일 수 있다. 산꼭대기에서 큰 소리로 외치며 기도하는 사람을 보면 하나님이 너무너무 멀리 계신 것으로만 느껴진다. 하지만 구원받은 사람에겐 주님이 가까이, 항상 그 사람 안에 계신다. 주님이 계시는지 안 계시는지,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무엇을 기뻐하시는지 싫어하시는지를 생각하지 않는 것이 주님을 멀리 하는 것이다. 주님이 좋아하는 것을 나도 좋아하고, 주님이 싫어하시는 것이 있다면 나도 싫어하고, 주님이 원하시면 나도 원하고, 주님이 원하지 않으시면 나도 원치 않고, 항상 주님과 함께 함으로 만족하는 것이 주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다. 그러면 자신의 모든 생활 속에 주님이 도와주시고 지켜 주신다는 것을 느끼고 경험하게 된다. 그 옛날 십자가에 죽어 주신 주님, 언제 오실 지는 모르지만 장차 영원한 천국으로 데려가실 주님, 그 주님은 믿으면서 현재 자신과 같이 계시는 주님은 왜 믿지 않는가? 주님은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라고 약속하셨다.
8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_약 4:8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하나님은 자신을 가까이 하는 사람을 가까이 하신다. 가까이 하신다는 것은 도와주신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을 멀리하는 사람에겐 하나님도 그 사람을 멀리 하신다.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주님을 모시고 함께 살면 주님이 그 사람의 생애를 지켜 주시고 도와주신다.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는 것을 느껴야 한다. 자신의 모든 사정을 알고 돌보아 주시는 주님, 잘하는 것이나 잘못하는 것도 보시고, 그 생각을 통찰하시고 지켜 주시는 분을 항상 느끼고 살아야 한다. 어떤 사람이 항상 자신을 따라 다니며 잘하는지 잘못 하는지 감시(監視)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물론 그런 일은 없겠지만 하나님은 구원받은 사람에게 그렇게 하신다.
1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2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3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4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_시 139:1-4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을까?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항상 말씀으로 나타나시기 때문이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믿으면 그 약속대로 이루어진다. 방송국에서 송신하는 전파가 라디오의 주파수에 맞으면 방송이 잡힌다. 방송 주파수를 맞춘다는 것은 가까이 하는 것이다. 주파수에 정확히 맞으면 방송이 잡히고 정확히 맞지 않으면 전파가 깨끗하게 잡히지 않는다. 사람이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 사람의 마음과 생활 속에 그 약속이 이루어지게 하신다. 구원받은 사람이 하나님을 멀리하면 성경에 많은 약속이 있을지라도 그 약속과 그 사람과는 상관이 없게 된다. 구원받을 때 하나님을 떠났던 사람이 말씀을 믿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처럼, 구원받은 이후에 하나님이 하신 많은 약속도 하나님을 멀리하면 그 약속과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그 약속이 실지로 이루어진다. 말씀을 읽고 듣고 외우고 마음과 생활 속에 간직하는 그것이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이다. 그러면 약속이 이루어지고 세상과는 점점 멀어진다. 말씀과 멀어지면 세상과 가까워진다. 하나님과 가까이 하면 세상이나 마귀, 죄와도 멀어진다.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 위해, 하나님의 약속을 받기 위해서, 성령의 인도를 받기 위해서는 말씀을 가까이 하도록 힘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