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품(性品) 구원 혹은 생활 구원

”다음에는 이삭이요”
싹이 생명의 시작이라면 이삭은 생명의 성장(成長)이라고 할 수 있다. 구원을 받으면 자라는 과정이 있다. 구원받았다는 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일 뿐이다. 물론 하나님의 자녀로서 구원은 완전하다. 만약 “구원받았으니 이제 됐다”하면서 뿔뿔이 흩어진다면 그것은 마치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아버지, 저를 낳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머니, 고맙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하고 집을 나가는 것과 같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는가? 아이는 어머니 품에 안겨서 온 가족들의 사랑과 보살핌을 받으면서 무럭무럭 자라야 한다. 어린아이가 할 일은 자라는 것이다. 먹을 것을 주면 먹고, 옷을 입혀 주면 입고, 씻겨 주면 씻는 가운데 점점 자란다.


사람은 육신적으로나 인격적으로 자라는 과정이 필요하다. 구원받은 사람도 구원을 받고 나면 그때부터 영적으로 자라는 과정이 반드시 있다. 그래서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골 1:6)라고 하신 것이다.

3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며
_살후 1:3

믿음은 처음에 시작된 것에 더 큰 믿음이 더해지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큰 믿음을 주십시오”, “태산 같은 믿음을 주십시오”라고 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라는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놀라운 기적이 나타날 것을 말씀하시며 그들에게 믿음이 없음을 지적하셨다. 구원받을 때 겨자씨 만한 참된 믿음이 시작되는 것이며 겨자씨, 그 씨는 아무리 작을지라도 생명이 있다. 생명이 시작되면 그때부터 자라는 것처럼 믿음도 성장한다. 그래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벧후 3:18)라고 한 것이다. 구원받은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는 과정이 있다. 

52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_눅 2:52

 예수님께서도 이 세상에 사람으로 탄생하셔서 육신이나 마음이 자라는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 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구원받은 사람도 자라 가는 과정이 있다. 

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_빌 2:12

바울이 빌립보에 가서 복음을 전한 후 말씀을 가르친 때가 있었다. 지금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지 않다고 했는데 편지로 이 말씀을 전할 때 그는 로마 옥(獄)중에 갇혀 있었다.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은 구원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완전히 이루라는 의미가 아니라 구원받은 이후에 생활 속에서 이루어 가야 할 구원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음이 변하고 생활이 변해서 구원받은 사람답게 살아가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좋은 나무가 되었으면 자라서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라야 되고 하나님의 자녀로 자라면 하나님의 자녀로서 합당하게 살아갈 수 있다. 이것은 구원받은 그날부터 주님 앞에 가는 날까지 계속해서 복종함으로 이루어지는 현재진행형이다. 

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_빌 2:13

구원받은 사람 속에는 하나님의 성령이 같이 계셔서 하나님이 행하신다. 하나님의 성령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소원으로 두고 행하게 하신다. 구원받은 사람은 마음속에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소원이 된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어떻게 하면 세상에서 한바탕 돈이나 벌어 볼까, 어떻게 하면 유명한 사람이 되어 볼까, 어떻게 하면 내 욕망을 이루어 볼까 등등 자기 나름대로의 소원이 있다. 그러나 구원받고 나면 그 소원이 바뀌고 사는 목적이나 가치관이 완전히 달라져 버린다. 전에는 그렇게 귀하게 보이던 것이 시시하게 보이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도 그렇게 천하게 보일 수가 없다. 세상 사람들이 상상하지 못하는 더 크고 영광스러우며 귀한 소망과 삶의 목적이 새로 생겼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광과 나라를 위해 마땅히 하고 싶은 것이 있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소원으로 두고 행하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뜻 가운데 살아가는 생활이 실제 이루어진다. 


구원받은 사람은 ‘죄 안 지어야지. 착한 일 해야지’라고 다짐하면서 속에서 나오는 죄를 억제하면서 사는 삶이 아니다. 신앙이 자라난다는 것은 옛 성품이 점점 무너지는 것이다. 사람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마음을 가지고 세상에 태어났다(렘 17:9). 그 마음이 점점 죽고 그 대신 주님의 마음이 구원받은 사람 안에 점점 이루어진다. 주님의 성품을 닮아 가면서 마음과 생각이 달라지고 사는 목적이 점점  달라진다.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으로서의 증거가 생활 속에 이루어진다. 그것을 가리켜 ‘생활 구원’이라고 한다. 마음과 생활이 변화되어 가는 생활 구원도 우리의 열심이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으로 되는 것이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깨닫게 하시고 그 뜻을 행할 마음과 힘을 주신다.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구원은 평생에 한 번뿐인 ‘영혼 구원’이고 그 다음 구원받은 사람으로서의 마음과 생활이 변화되며 성장하는 과정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구원받은 사람은 말로만이 아니라 그 생활 속에 구원이 이루어져 가므로 구원받은 사람으로서의 증거가 나타나게 된다.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빌 1:27)고 하신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제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명하시는 것이다. 곧 복음으로 구원받았으면 구원받은 사람답게 천국에 들어갈 하늘나라 시민답게 합당하게 살아가라는 말씀이다. 구원받은 사람의 마음과 생활이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으로서 합당하게 점점 다듬어지고 형성되는 과정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사람으로 세상에 태어났을지라도 어릴 때는 사람으로서의 인격이 나타나지 않는다. 강아지와 어린애를 같이 놔두면 함께 기어다니고 주워 먹기도 하고 똥오줌싸고 비슷하게 행동한다. 하지만 조금만 지나면 사람과 개는 완전히 달라진다. 강아지는 땅에 있는 것을 주워 먹지만 아이는 걸어다니며 아무것이나 주워 먹지 않는다. 크면서 사람으로서의 인격이 갖추어진다. 이와 같이 구원을 받은 사람과 받지 않은 사람도 처음에는 비슷한 것 같지만 조금 지나면 완전히 달라진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인격이 형성되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삶으로 생활 속에 구원을 이루어가는 것이다.

영혼 구원과 생활 구원에 대한 혼동(混同)으로 인한 오해(誤解)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_빌 2:12
)는 이 생활 구원이 구원받은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영혼 구원’은 주님의 은혜로 값없이 이미 받았고 우리 ‘몸의 구원’도 주님 오실 때 주님이 구원받은 사람을 변화시키시니 당장 이루어지지만, 구원받은 이후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생활 속에서 이루어가야 하는 구원은 우리가 해야 될 일이기 때문이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을 두고 “어떻게 구원받았다고 합니까? 그렇게 말하면 안됩니다. 성경에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했는데 어떻게 감히 구원을 받았다고 합니까? 교만하게…”라고 되묻는 사람들이 있다. 이 말씀은 이미 받은 영혼의 구원을 잃어 버릴까봐, 지옥 갈까봐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야 함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靈)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養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 8:15)는 말씀에서 보듯이 영혼이 구원받은 사람은 무서워하는 종의 영이 아닌 양자의 영을 받았다. 종은 쫓겨날까 봐 항상 주인의 눈치를 보고 또 잘못하면 쫓겨나기도 하지만 아들은 쫓겨날 걱정이 없기 때문에 그 영혼이 두려워하거나 지옥 갈 걱정은 하지 않는다.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그 구원은 ‘영혼 구원’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이루어 가야 할 구원 즉 ‘생활 구원’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 10:28,29)라고 말씀하셨다. 영원히 멸망치 않는 것이 영생(永生)이다. 구원받은 사람의 생명은 주님의 손 안에 있으므로 아무도 빼앗을 수 없다. 만약 예수님께서 “너, 영생 받았으니까 안 잃어 버리도록 잘 간직해라. 잃어 버릴지도 몰라”라고 하셨다면 얼마나 걱정되겠는가? 복잡한 시장 바닥을 지나갈 때는 엄마가 아이의 손을 꼭 붙잡고 가는 것이며 아이더러 “엄마손 꼭 잡아. 놓치면 나는 몰라”라고 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주님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단단히 붙잡으신다. ‘내 주의 손에 붙잡혀 천국에 올라가겠네 괴로우나 즐거우나 예수가 거느리시네’(찬송가 444).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손 안에 있고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다. 구원받은 사람의 생명이 뺏기지 않도록 지켜 주시는 분은 바로 주님이시다.

생활 구원을 이루는 과정에 있는 일들

① 옛 성품으로 인한 육신(肉身)과 성령(聖靈)의 싸움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구원은 받았지만 육신 속에 옛 성품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다. 구원받았다고 욕심이 없어지고 미워하는 마음이나 나쁜 생각이 다 없어진 것은 아니다. 구원받을 때는 너무 기쁘고 감사해서 육신의 죄성(罪性)이 없어진 것처럼 느껴질지 몰라도 조금 있으면 ‘나, 여기 있다’하는 것처럼 나온다. 하지만 구원받은 사람  안에는 그 육신의 죄성과 싸울 수 있는 성령의 능력이 있다. 
사도 바울은 자신 속에 선(善) 즉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동시에 악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서 이 두 마음이 서로 싸운다고 했다.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_롬 7:21-24

 이와 같은 사도 바울의 간증처럼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한편 육신대로 세상 것을 따라 살고 싶은 옛 성품이 아직 남아 있어서 서로 엎치락뒤치락 싸운다. 이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

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_롬 8:7-8

구원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려고 하면 고난과 희생이 있기 때문에 육신은 그것을 싫어하는 것이다. 육신은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않으며 세상을 사모하고 다시 세상으로 가려고 한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자 하는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는 사실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신을 쳐서 복종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롬 8:13)라는 말씀은 육신대로 살면 영혼이 죽는다는 뜻이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의 생활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죽은 것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곧 성령으로 육신을 굴복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도 내 몸을 쳐서 복종시킨다고 하였고(고전 9:27), 사도 베드로도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 2:11)고 권고하였다. 육신이 하고자 하는 대로 내버려 두면 다시 세상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있으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능력으로 육신을 굴복시켜야 한다. 

21 종을 어렸을 때부터 곱게 양육하면 그가 나중에는 자식인체하리라
_잠 29:21

우리의 육신은 아직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받지 못했다. 종은 아주 엄하게 다스려야 하듯이 육신도 엄하게  통제하여야 한다. 그리스도인에게도 육신이 있으므로 하나님의 법을 버리고 육신을 따라 행하지 않도록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하신 것이다.

② 징계(懲戒)
육신대로 살면 주님을 위한 삶을 살지 못하게 된다. 예를 들면 어떤 집에 자녀가 둘 있는데 한 자녀는 부모님 말씀을 잘 순종하고 공부도 잘하며 예의도 바르다고 하자. 그러면 부모는 매일 칭찬해 주게 된다. 다른 한 자녀는 말썽꾸러기여서 말도 듣지 않고 학교도 가지 않고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고 나쁜 친구나 사귀고 못된 짓만 하고 다니며 매일 싸움을 하여 얻어맞고 다닌다고 하면 부모의 근심거리가 될 것이다.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_히 12:7-8

구원받으면 하나님은 자기 자녀를 근실히 징계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를 징계하시고 채찍질하신다. 징계가 없는 것은 사생자, 즉 참 아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도 자기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기에 엄히 꾸짖고 채찍질한다. 거듭나지 아니한 사람,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이 가만히 놓아두신다. 조금 있다 지옥 갈 테니까 내버려두시는 것이다. 그러나 거듭난 사람이 잘못하면 하나님이 가만 놔두시지 않는다. 만일 구원받았다는 사람이 거짓말하고 남을 속였다면 몇 배의 손해를 보게 될 것이다. 남의 돈을 떼어먹었으면 몇 배를 잃게 하시고 바른 길로 가도록 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면 거기에 따른 징계가 있다.
나쁜 짓을 하는 것도 죄지만 하라는 것을 하지 않는 것도 죄이다. 거듭난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하지 않아야 될 일을 하게 되면 물질적으로나 육신적, 정신적, 신앙적으로 징계가 있고 심한 경우에는 육신을 죽이기까지 하신다. 그러므로 징계가 있음을 알고 두려워해야 한다.

1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_고후 7:1

하나님은 아주 엄하신 아버지이시다. 말씀을 순종하면 사랑의 하나님이시지만 잘못하면 엄히 다스리는 하나님이시다.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 하리라”(잠 23:13)라는 말씀이 있다. 요즘 아버지, 어머니들은 자식을 하나 혹은 둘만 낳기 때문인지 잘못해도 때리지 않고 버릇없이 행동해도 가만 두는데 그것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귀한 자식일수록 더 엄하게 키워야 한다. 성경은 자식이 잘못할 때는 따끔하게 때리라고 하신다.

14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에서 구원하리라
_잠 23:14

이렇게 말씀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 자녀를 때리지 않으시겠는가? 하나님은 엄히 때리신다.

24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_잠 13:24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엄히 징계하신다. 징계는 빨리 돌이키면 돌이킬수록 가벼워진다. 고린도 교회에서는 징계를 받아 병든 자도 많고 죽은 사람도 적지 않다고 하셨다(고전 11:30). 징계로 죽은 사람은 주님 앞에 가서도 부끄럽게 될 것이다. 이런 문제들이 있기 때문에 두렵고 떨림으로 항상 육신을 복종시켜야 하는 것이다.

생활 구원의 표준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생활 속에서 구원을 이루어가야 한다. 마음과 생활이 하나님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그것이 구원을 이루어가는 것이다. 그것은 옛 성품이 점점 무너지고 마음과 생활 속에 주님의 성품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고 하셨다. 구원받은 사람이 하나님 아버지처럼 어떻게 온전해지겠는가? 하지만 하나님 아버지를 1/10만 닮아도 좋다든지, 50%만 닮아도 좋다든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고,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하심으로 표준을 하나님께 두셨다. 육신의 아버지도 아버지가 훌륭하면 아들도 자신 못지 않게 훌륭하게 되기를 원한다. “야, 너는 내 아들이지만 너는 나를 반만 닮으면 된다”고 하지 않고 “나보다 나으면 더 좋지만 적어도 나만큼은 되어야 한다”라고 하지 않는가?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보다 더 나을 수는 없으므로 하나님의 온전하심에 삶의 표준이 있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解産)하는 수고를 하노니”(갈 4:19)라고  말씀했다. 구원받은 사람은 누구나 그리스도께서 마음에 계시지만 그리스도의 형상이 생활 가운데 이루어져야 한다. 주님의 온유한 마음과 사랑, 겸손, 주님의 성품이 그 마음속에 이루어지도록 다시 해산하는 수고를 한 것이다.  
어머니는 자식을 낳는 수고를 할 뿐만 아니라 그 자식을 건강하게 또 인격적으로 훌륭하게 키우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는지 모른다. 요즘 어머니들은 무슨 죄가 그리 많은지 자식을 낳고 길러서 학교까지 보냈는데 대학 입학시험 치는 시간에도 추운 대학교 문 앞에서 달달 떨면서 ‘아이고 내 아들, 합격하게 해 주세요. 딱 붙게 해 주세요’라며 빌기까지 한다. 자식을 위해서 어머니들이 하는 것을 보면 참 자식이 뭔지 모르겠다는 심정이 들 때도 있다.


바울 사도도 전도해서 구원받게 하는 수고를 해 놓고 또 그들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마음과 생활이 나타나기까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합당하게 살아가게 하기까지 다시 해산하는 수고를 한 것이다. 그들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원했던 것이다. 그는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전 11:1)라고 말씀했다. 그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하나의 모델(model)이며 견본(見本)이다. 
한데 바울 사도 자신이 그리스도를 본받았으니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고 하셨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본받는 것인가?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_갈 2:20

바울 사도는 스스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했는데 멀쩡하게 살아 있으면서 죽었다는 말씀은 도대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가? 그것은 바울이 자기 자신의 계획과 욕망, 고집, 욕심, 자기의 이상 등 그의 모든 것은 죽고 이제 자기 안에 사시는 주님이 자신의 모든 것이 되심을 나타낸 것이다. “주님이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셨으므로 그 하나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산다”고 담대하게 간증했던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육체는 껍데기일 뿐이고 그 안에는 주님이 사신다. 바닷가에 가보면 고동 같은 것이 마구 기어다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고동이라면 그렇게 빨리 기어갈 리가 없어서 자세히 보면 그 안에 게가 있다. 조그만 게가 고동 껍질을 뒤집어쓰고 다닌다. 그 안에 있던 고동 알맹이는 어떻게 되었는지 없어지고 껍질을 게가 뒤집어쓰고 다니다 싫증나면 내던져 버리고 더 좋은 고동 껍질이 있으면 그것을 쓰고 다닌다. 구원받은 각 사람은 껍데기일 뿐이고 그 안에 주님이 계셔서 자기 뜻대로 그 사람을 인도하시고 다스리시며 뜻대로 쓰신다. 주님께서 그 마음에 완전히 자리를 잡고 그 사람을 다스릴 수 있게 된다면 그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은 갈라디아의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그러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했고 주님도 구원받은 각 사람에게 이것을 요구하실 것이다. 믿음이 자라 간다고 하는 것은 주님으로 그 사람의 마음이 점점 더 채워지는 것이다. 자신은 죽고 주님이 자신 안에 계셔서 모든 것을 주장하시므로 생활 속에서 구원이 이루어진다.

생활 구원을 위한 기본 요건들

① 말씀을 사모해야 한다

2 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_벧전 2:2

자라는 구원, 그리스도께 미치도록 그 성품이 변화되는 구원은 갓난아이가 젖을 사모하는 것처럼 말씀을 사모함으로 이루어진다. 말씀을 계속 들으면 점점 자란다. 영혼이 구원받을 때도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고 구원받은 이후 각 사람의 마음과 생활이 변화되는 것도 하나님이 공급하여 주시는 은혜와 생명을 받음으로 가능하다. ‘더 주고 더 주네 항상 더 주시네 은혜 풍성하시나 항상 더 주시네’(찬송가). 영혼 구원을 위한 은혜는 한 번 받지만 그 후에 주님 안에 있는 충만하신 은혜를 계속 공급받게 된다.

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_요 1:16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는 말씀처럼 계속 더 풍성히 받는 생명으로 인해서 마음과 생활이 변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올바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지 자신의 힘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말씀도 듣지 않고 교제도 등한히 하며 말씀대로 살기도 게을리 하면서 자신의 신앙이 성장하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세월만 흘러 구원의 연수만 늘 뿐 그 사람의 마음과 생활은 순전히 육신적, 세상적이고 신앙은 자라지 않은 사람이 있다. 사람이 나이는 많이 먹었는데 도무지 키와 인격이 자라지 않아 어린아이 같다면 어떠하겠는가? 신앙도 점점 자라야 한다. 그런데 신앙이 자라는 것은 혼자서는 불가능하다. 어린아이가 어떻게 혼자 자랄 수 있겠는가? 온 가족들의 사랑과 보살핌을 받으면서 날마다 자라는 것처럼 구원받은 사람은 성도(聖徒)들과 함께 말씀을 배우고 교제하는 가운데서  각자의 신앙이 무럭무럭 자라 간다.

② 한 성령 안에 거해야 한다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4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_엡 4:3-4

구원받으면 구원받은 사람들 모두 합해서 한 몸 즉 그리스도의 몸이 된다. “사랑하는 주님 예수 같은 주로 섬기나니 한 피 받아 한 몸 이룬 형제여 친구들이여”(찬송가 278)라는 찬송처럼 구원받으면 한 피 받아 이루어진 한 몸이 된다. 전에 다니던 본 교회, 옛날에 다니던 그 교회가 아닌 거듭난 성도(聖徒)들과의 교제 안에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이루게 된 것이다. 

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_고전 12:13

성령으로 하나된 주님의 몸된 교회 안에 거함으로 한 성령의 공급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③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하나가 되어 연합해야 한다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_엡 4:13-14

교회당에 다니는 사람 중에 믿는다는 사람이 많지만 구원받은 성도들과 교제가 되지 않고 하나가 되지 않는 원인은 무엇인가? 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그 믿는 내용이 다르기 때문이다. 아는 것과 깨달은 것이 다르기 때문에 교제가 안 되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참으로 말씀을 올바로 깨닫고 거듭나서 같은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교파나 국적과 관계없이 모두 주님 안에서 하나이다. 믿는 것과 아는 것이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한 데까지 같이 자란다. 몸이 자랄 때 몸에 붙어 있는 모든 지체가 함께 자라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도 성도들과 같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점점 자라 간다. 구원받은 사람들의 무리 안에 주님의 형상이 이루어지고 개인, 개인 속에도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신앙이 성장하게 되면 이제 어린아이 같이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서 요동하지 않게 된다. 사람들의 이상한 꾀임이나 간사한 유혹에 빠지지도 않고 잘못된 거짓 교훈에 끌려가지도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서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되고 올바른 신앙 자세가 세워진다. 사람도 인격적으로 성장하면 남이 어떻게 하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나는 이렇게 살아가겠다’는 자신만의 주관이 생기듯 장성한 스리스도인은 하나님을 향한 확실한 목적과 의지를 가지고 살게 된다. 사람들이 세상적인 유행과 사조에 밀려다니지만 구원받고 인격적으로 성숙한 사람은 세상의 풍조에 밀려다니지 않고 근신하고 깨어 자기 할 일을 자기가 찾아서 하게 된다. 신앙이 성장하면 하나님의 자녀로서 주님의 영광에 합당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주님을 위하여 산다. 

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
_계 22:12

④ 각 마디를 통하여 공급받음으로 신앙이 성장한다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_엡 4:15-16

구원받은 사람들이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으로 연합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범사에 주님께 미치도록 점점 자란다. 주님은 머리이시며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다. 머리에 있는 뇌하수체에서 온 몸에 성장 호르몬이 공급됨으로 그 몸이 정상적으로 자라는 것처럼 머리되신 주님으로부터 온 몸인 그리스도인들이 각 마디인 서로의 지체를 통해서 주님의 말씀을 공급받음으로 자라는 것이다. 구원받은 사람 모두가 합해서 한 몸이고 각 개인은 그 지체이다. 신경과 힘줄 등을 통해서 머리에서 온 몸으로 모든 것이 공급되므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서로 연락하여 피차 합해서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한다. 그 몸에 붙어 있기만 하면 자신이 지체로서의 할 일과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알고 행할 수 있게 된다.

⑤ 각 지체로서 분량대로 역사하게 된다
교회 안에서 무엇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기보다는 교회의 일에 참여하는 가운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자연스럽게 알고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교회는 밖으로는 복음이 전해지고 안으로는 구원받은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 하나가 되어 주님의 뜻을 순종해 나간다. 그 가운데 주님의 일이 무엇인지 알고 그 다음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할 수 없는 일은 주님이 맡기지 않으신다. 

3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_롬 12:3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그 이상을 하려고 하는 것은 교만이 될 수 있고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으려 하는 것은 불순종이 될 것이다. 그 이상도 말고 그 이하도 말고,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각자 자신의 할 일을 스스로  찾아서 행해야 한다. 교회에서는 어떤 형제에게 “이 일을 해주시오”라거나 어떤 자매에게 “저 일을 해 주시오”라고 부탁하는 일이 있을 수 있지만 일일이 모든 일을 부탁하지는 못한다. 자기가 스스로 찾아서 해야 한다. ‘이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내가 할 일은 내가 해야  되겠다’고 마음을 정해야 한다.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도 자기 할 일을 자기가 하고 자기 장래를 자기가 준비해 나가 듯이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이다. 남이 하니까 나도 하고 남이 안 하면 나도 안 하는 것은 신앙생활이 아니다. 남이 하든 말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일이다’고 생각하고 아무에게도 뺏기지 말고 양보하지도 말고 방해받지도 않으면서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해야 한다. 말없이, 자랑이나 교만할 것도 없이 행하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는 일이 있고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는 말씀이 이루어진다(엡 4:16). 그 안에서 모두 같이 자라 가다가 주님 오실 때 주님의 영광 앞에 같이 서게 될 것이다. 주님 앞에 설 때 자신의 신앙이 정상적으로 자랐는지 못 자랐는지, 정상적으로 신앙생활을 했는지 못했는지 주님 앞에 완전히 드러나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칭찬과 영광을 얻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책망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그 영광은 잠시 후에 끝나는 것이 아닌 영원한 것이다. 각자 행한 대로 영광이 다르기 때문에 자신의 신앙생활을 잘 점검해서 하나님 앞에 설 때 칭찬을 얻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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