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은 확실한 순간적인 경험(經驗)이다
6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_골 1:6
5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6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_빌 1:5-6
이 말씀에서의 첫날은 교회당에 나가는 첫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깨달은 날을 가리키는 것이다.
구원받는 것은 막연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영적으로 다시 한 번 태어나는 분명한 경험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복음으로써 거듭나는 일이 분명히 있음을 말하고 있다(벧전 1:3, 1:23 ;약 1:18 ;고전 4:15). 일제시대 평양에서 전도하셨던 길선주 목사는 자신의 생일이 둘이라고 자주 말했다고 한다.
요한 웨슬리(John Wesley)는 1703년에 영국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엄격한 종교 교육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나중 옥스퍼드 대학에서도 종교생활 즉 자신이 신앙적으로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것을 삶의 원칙과 규율로 삼아 열심히 살았으며 영국 국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그는 동생 찰스 웨슬리와 함께 미국에 선교사로 가던 선상(船上)에서 자신이 구원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은 일이 있었다. 풍랑으로 인해 배가 파선(破船)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는 죽음을 너무나 두려워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 배에는 구원받은 모라비안교도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도 찬송을 부르는 평안한 모습을 본 그는 그들의 믿음이 자신의 믿음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배가 부두에 닿았을 때 그는 모라비안 목사인 스팡겐베르그(Spangenberg)를 만나 신앙 상담을 요청하였다. 웨슬리는 “성령이 당신을 하나님의 자녀임을 당신의 영혼으로 더불어 함께 증거하고 계십니까?”,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구원하셨음을 알고 계십니까?”라고 묻는 그 목사의 질문에 제대로 답할 수 없었다.
그후 귀국하여 구원받은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서 ‘행위의 열심’이 아니라 ‘은혜(恩惠)에 의해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이론적으로는 알았으나 확신을 얻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자신의 구원에 대하여 확신을 얻게 되었는데 그날의 상황을 그의 일기에 이렇게 기록했다.
“1738년 5월 24일 저녁, 올더스 게이트 거리의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성경을 배우는 한 작은 모임에 나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모임을 인도하는 한 사람이 마르틴 루터가 저술한 로마서 주석(註釋)의 서문을 읽고 있었다. 약 8시 45분 경이었는데 그가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에 역사하신 변화에 대하여 설명을 하고 있는 동안 나는 이상하게 내 마음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 나는 진실로 내가 그리스도를 믿고 있음을 느꼈다. 나의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뿐이시다. 곧 나의 죄를, 나와 같은 죄인의 죄까지 담당하셨고 죄와 죽음의 법칙에서 구하여 주셨다는 확신을 그가 주셨다.”
영국의 유명한 전도자 스펄젼(C. H. Spurgeon)은 18세기에 활발히 복음을 전하던 사람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교회에 다녔다. 어느 추운 겨울날 어머니와 같이 교회당에 가다가 눈(雪)이 너무 많이 와서 가까운 어느 농촌 교회에 들어갔다. 눈이 너무 많이 왔기 때문인지 교회당에는 몇 사람밖에 오지 않았고 심지어 목사도 오지 않았는지 구두방 직공 아니면 양복점 직공으로 보이는 초라하게 생긴 한 청년이 앞에 나가는 것이었다. 그는 “오늘 저녁에는 목사님이 오지 않으셨기 때문에 대신 제가 말씀 전하겠습니다”라고 하고 나서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仰望)하라 그리하면 구원(救援)을 얻으리라”라는 이사야 45장 22절 말씀을 읽고 설교를 시작했다. 스펄젼은 ‘저 초라하게 생긴 청년이 무슨 말을 할까?’하고 그를 주목해 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청년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수를 믿는 것은 보는 것입니다. 보는 데는 돈도 안듭니다. 보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 학교에 갈 필요도 없습니다. 누구든지 볼 수 있습니다.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배운 사람이나 못 배운 사람이나 누구든지 보기만 하면 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보십시오. 피를 뚝뚝 흘린 것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들의 죄를 위해서 죽었다. 내가 너희 대신 심판을 받았다. 내가 너희 대신 매를 맞았다. 보라, 나를 보라, 보라, 보라……”
청년은 ‘보라’는 말만 하다가 말할 밑천이 떨어져 버렸다. 스펄젼은 하도 우스꽝스러워서 그냥 그 사람을 보고 있는데, 그 사람이 스펄젼에게 “청년, 왜 나를 보고 있는가! 나를 보지 말고 주님을 보게나. 주님을 보지 않으면 자네의 모습이 세상에서도 초라하고 죽어서는 더 초라할 것일세. 예수님을 보게나”라고 하는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그때 그는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처음 깨달았다. ‘그렇다. 주님이 내 대신 채찍을 맞으셨고 저주를 받으셨고 피를 흘려서 나의 죄 문제를 해결하셨구나’라는 사실이 깨달아지고 십자가가 마음에 믿어졌다. 그날 그는 참으로 주님을 보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구원을 얻은 스펄젼은 후에 유명한 전도자가 되었다.
미국의 유명한 전도자 디. 엘. 무디(D. L. Moody)는 죽기 얼마 전 자신에게 죽음이 가까이 온 것을 알고, “어느 날 제가 죽었다는 신문 기사를 읽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믿지 마십시오. 무디는 죽은 것이 아닙니다. 무디는 첫 번 태어난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 두 번째 태어났습니다. 첫 번째 태어난 무디는 죽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태어난 무디는 죽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한다.
한 번 태어난 사람은 두 번 죽는다. 왜냐하면 육신이 죽는 것이 한 번 죽는 것이요(히 9:27)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되어서 영혼과 육신(마 10:28)이 동시에 영원한 불못인 지옥에 던지우는 것이 둘째 사망(계 20:14)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번 태어난 사람은 육신은 한 번 죽을지라도 둘째 사망은 없다. 거듭난 사람은 새 하늘과 새 땅 곧 천국에서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된다(계 21:2∼4). 하나님의 자녀로 한 번 태어나는 경험을 하고 그리스도의 영(靈)을 소유해야(롬 8:9)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며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롬 8:15).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 경험도 없이 막연히 교회당에 다니면서 다른 사람들이 하는 대로 “하나님 아버지”라고 기도하다 보면 나중에 습관이 되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된다. 그러나 문제는 자신이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탄생한 적이 있는가 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면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마치 길거리에 지나가는 낯선 사람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유대인들이 “우리가 음란(淫亂)한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요 8:41)라고 예수님에게 말하였을 때 예수님은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요 8:44)라고 하심으로 말미암아 큰 싸움이 시작되었다. 유대인들은 스스로 선택받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로 철저히 믿고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하셨으니 큰 문제가 생긴 것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려면 혈통(血統)으로나 육정(肉情)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나야 한다(요 1:13). 거듭나는 것은 순간적인 분명한 경험이다.
필자에게도 그 날이 있었다. 필자가 교회에 다닌 것은 중학교 1학년 때부터였다. 나중에 성경을 열심히 배웠고 신학교를 다니면서 교회를 맡아 설교도 했다. 누구보다도 열심 있는 기독교인이라고 자처(自處)했으며 금식 기도나 산(山) 기도, 철야 기도, 노방(路傍) 전도 등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 공원에서나 열차 안에서 전도지를 나눠주면서 전도도 하고 교회를 맡아서 열심히 설교도 했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젊은 사람이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저렇게 할 수 없다”라는 칭찬도 들었고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 자신이 거듭나지 못했음을 발견하게 되었고 ‘지금 죽으면 하나님 앞에 갈 수 없다’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했어도 내가 도무지 너를 알지 못한다고 하신 마태복음 7장 22절의 주님의 말씀이 나 같은 사람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고민 고민하다가 1962년 10월 30일, 확실한 복음을 듣고 깨달아 거듭나게 되었다. 필자가 그렇게 배우고 설교했던 십자가의 보혈(寶血)이 비로소 마음에 믿어졌던 것이다. “이 좋은 날 내 천한 몸 참 중생(重生)한 새 몸일세 기쁜 날 기쁜 날”(찬송가 209). 거듭난 사람은 분명히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나는 날이 있다.
거듭나는 일이 분명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듭나는 확실한 경험도 없이 막연한 종교생활을 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생각할 때 얼마나 슬프고 두려운 일인지! 마귀는 교회당을 많이 만드는 것을 겁내지 않으며 열심히 종교생활을 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다만 구원받는 역사(役事)만은 두려워하며 이를 전적으로 대적(對敵)한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_요 5:24
구원의 확신은 구원받은 각 개인이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자신의 구원 문제를 확실히 하지 않고 사는 것 같이 위험한 일은 없다.
교회사의 큰 흐름 속에 교리주의(敎理主義)와 신비주의(神秘主義)가 있다. 성경을 교리적으로나 지식적으로 잘 알고 복음도 인정하지만 그 복음이 영혼 속에 확실히 이루어지지 않았을 경우 우리는 이것을 교리주의라고 한다. 반면 복음이 마음에 믿어지는 체험 대신에 다른 엉뚱한 체험들, 예를 들어 기도하다 불을 받았다거나, 번쩍번쩍하는 금 십자가를 보았거나, 방언을 하거나 안수 기도를 받고 병이 나았거나 하는 것으로 구원을 얻은 것으로 착각할 때, 우리는 이것을 신비주의라고 한다.
영생의 확신은 교리주의도 신비주의도 아닌 성경에 나타난 복음의 말씀에 근거한 분명한 체험이다. 성경은 복음(福音)을 듣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음으로 거듭난다고 하였다. 복음을 수박이라고 가정해 보자. 교리주의는 수박이 어떻게 생겼는지 먹으면 어떤 맛이 나는지 등등을 가르치지만 실지로 먹어 보지는 못한 경우에 해당된다. 반면 신비주의는 분명히 먹은 체험이 있지만 수박을 먹은 것이 아니라 사과나 참외, 기타 다른 것을 먹은 경우이다.
이 두 경우와는 달리 정말 수박 맛을 본 사람은 그것을 분명히 알 수 있고 이야기 할 수 있다. 복음은 이와 같은 것이다. 복음이 믿어진 사람은 도무지 부인할 수 없는 큰 확신을 얻으며 얼마나 큰 능력이 있는지를 자신 스스로가 안다.
5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_살전 1:5
10 그날에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얻으시고 모든 믿는 자에게서 기이히 여김을 얻으시리라 (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_살후 1:10
믿음에는 자신이 잘 믿으려고 노력하는 믿음이 있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믿어지는 믿음이 있다. 참된 믿음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믿어지는 믿음인 것이다. 그 때 각 사람은 자신이 영원한 생명을 얻었음을 확신하며 사망에서 생명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졌음을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