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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에 예언된 그리스도의 모습이 4복음서에서는 각각 다르게 묘사되었다는데 설명해 주십시오.

텍스트 읽어주기

구약성경은 메시야에 대해서 이스라엘의 왕(슥 9:9), 여호와의 종(사42:1), 사람의 아들(창 3:15), 하나님의 아들(사 9:6), 이렇게 4가지의 모습으로 예언하고 있습니다.

정리하면 곧 ‘왕, 종, 인자 및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인데 4복음서는 이러한 구분으로 그리스도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빌딩을 각각 다른 방향에서 그리게 할 때, 그림을 서로 비교해 보면 비슷한 점도 많지만 다른 점도 많이 나타나는 것과 같다 하겠습니다.


요한계시록 4장에도 4복음서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 네 생물이 있는데, 첫째는 사자 같고 둘째는 송아지 같고 셋째는 사람 같고 넷째는 독수리 같다고 했습니다. 이 네 생물은 4복음서의 성격이자 예수님의 4가지 성품을 잘 표현해 줍니다. 우리는 유다 족속의 사자에게서 왕 되신 예수님을, 송아지처럼 종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사람에게서 인자를,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독수리에게서 하나님의 아들을 볼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4복음서의 특징을 살펴보면 마태는 예수님의 왕 되심을 보여주는 사건과 말씀과 행동을 기록하였습니다. 마태는 오래 전부터 선지자들이 예언해 온 이스라엘의 왕, 예수 그리스도를 맨 앞에서 그림의 중심으로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에는 왕이 뒷면으로 들어가고 여호와의 종의 모습이 돋보여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종으로서의 예수님을 묘사합니다. 누가복음은 인자의 모습이 돋보여 나타납니다. 요한복음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그림 전체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네 가지 모습을 염두에 두지 않고서는 복음서를 올바로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생애에 대한 일대기를 써 보려고 노력할 때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 네 기자들이 동일한 사건들을 기록하지만 그것들이 관점에 따라 다르게 부각되었기 때문입니다. 기자들은 그리는 그림에만 열중하고 있을 뿐이지 색깔의 선택에는 별로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연대가 무시되기도 했습니다. 어떤 기자는 몇 달을 두고 따로따로 일어난 사건을 마치 연달아 일어난 사건처럼 기록하기도 했으며, 어떤 기자는 그 사이에 또 다른 사건을 집어넣기도 했습니다. 각 기자는 각자의 주제의 특징에 따라 그리스도의 모습을 부각시켰던 것입니다.

각 복음서의 특징을 살펴보면 이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각각의 복음서의 특징을 더 깊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족보가 1장부터 나옵니다. 이 책은 유대인을 상대로 씌어졌으므로, 왕위에 대한 합법적인 권위가 우선적으로 증명되어야 했습니다. 때문에 예수님의 법적인 권위가 다윗의 혈통에 따르고 있음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족보가 아브라함에서부터 시작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곧 아브라함에게는 한 민족의 조상이 될 것과 그 민족이 거할 땅에 대한 약속이, 다윗에게는 이 민족을 다스릴 후손이 일어나 왕위를 계승할 것이라는 약속이 주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메시야에 대해서 아브라함 이상의 족보가 필요 없습니다.

마태복음의 중심은 ‘하늘나라(天國)’입니다. 이 단어가 마태복음에 32번이나 나오는데 신약의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세상이 하늘의 지배 아래 곧 하늘나라를 다스리는 아들 되는 분의 지배 아래 있음을 뜻합니다.


마가복음에는 여호와의 종으로서 그리스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사람의 종이 아니라 여호와의 종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마가복음에는 예수님의 족보가 없습니다. 출생도, 유년기도, 베들레헴 사건도, 청소년기도 다 빠졌는데, 그는 단지 종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복음서는 곧장 종으로서 섬기는 일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또 기록된 네 가지 비유도 모두 섬기는 일에 관련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를 제외하고는 한번도 ‘주’라고 불리우신 적이 없으며, 언제 어느 곳에서든지 일하시기를 주저하지 않으셨습니다. 심지어 끼니를 거르면서까지 자신의 일을 하셨으니 진정한 종의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아버지’라는 말이 없는 것도 종의 입장을 기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에는 인자로서의 그리스도의 모습이 나타나있습니다.

예수님의 족보가 여기서는 아담까지 올라가고 있습니다(눅 3장). 마태복음처럼 아브라함에게서 멈추지 않고 첫 인간에게까지 올라가는 이유는 인자로서 예수님은 모든 인간을 다 포용하시기 때문입니다. 최초의 사람 아담은 실패한 대표이고, 마지막 아담인 예수님은 그 실패를 회복하시는 대표인 것입니다.

특별히 이 복음서는 예수님의 기도하시는 모습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인간 본연의 모습, 곧 의지하는 인간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완전한 인간이신 그분은 항상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 있습니다(눅 22:41).

또 왕의 복음인 마태복음에서 “천국은 마치”로 시작하는 비유가, 누가복음에는 “어떤 사람이”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또 예루살렘을 보시며 우시고, 말고의 귀를 붙여주시며, 십자가상의 강도를 긍휼히 여기신 것 등에서 그분의 인정과 동정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인간적인 족보가 없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1:1,14).

하나님께서 성육신 하셨으니 성육신 하신 그대로 절대자(I am)이신 것입니다. 여기서는 동산의 고통이나 피땀 흘리는 모습이 드러나 있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에서만 관원들이 주를 체포하러 왔을 때 ‘내로라(I am)’하는 자기의 명칭을 제시하셨습니다. 이 말을 듣고 그들이 뒤로 물러가 땅에 엎드러진 것은 곧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물러선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요한은 예수님의 신성을 정면으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면담이 많이 나오는 이유도 그분을 하나님으로 드러내기 위해서이고, 요한복음에만 있는 특유의 기적 넷은 모두 그분의 신성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귀족의 아들을 치료하신 것과 나면서부터 맹인된 자의 눈을 보게 하신 것과 나사로를 죽은지 사흘만에 무덤에서 살리신 것 등이 그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여러 번 자신 자신이 하나님과 동일한 성품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 5:18). 이는 곧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신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I am)”(요 8:58)라고 하신 말씀에서도 약 1500년 전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I am)”(출3:14)라고 하신 말씀을 예수님께서 그대로 사용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정리하면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은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함입니다.

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복음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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